영화 휴민트, 7년의 배신, 현실의 '휴민트 유출'이 영화보다 잔인했던 이유
사실 어제는 정말 이상한 날이었어요. 낮에는 초여름처럼 덥더니 해가 지자마자 겨울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찬바람이 쌩쌩 불더라고요. 퇴근길에 얇은 코트 깃을 여미며 걷는데, 문득 예전에 봤던 영화 <베를린>의 엔딩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1번 편도입니다."라고 말하던 표종성의 그 결연한 목소리 말이에요. 13년이나 지났는데 왜 갑자기 그게 생각났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라 무의식중에 제 뇌가 과거의 기억을 뒤적거리고 있었나 봅니다.
집에 오자마자 대충 씻고는 냉장고를 뒤졌어요. 지난 주말에 친구가 사다 준 흑맥주가 한 캔 남아 있더라고요. 맥주 캔을 따는 '칙' 소리가 꼭 영화 속 소음기 달린 총성처럼 들리는 밤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영화를 볼 때 줄거리보다 인물들의 표정을 더 뜯어보는 편이에요. 특히 이번 영화에서 조인성 배우의 그 '너무나 선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목소리와 박정민 배우의 '일그러진 순정'이 부딪힐 때의 공기가 너무 궁금했거든요. 빨래 건조기가 돌아가는 덜컹거리는 소리를 백색 소음 삼아, 저는 그렇게 블라디보스토크의 혹한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습니다.
7년의 배신, 현실의 '휴민트 유출'이 영화보다 잔인했던 이유
영화를 보다가 조 과장이 정보원을 포섭하기 위해 진심을 다하는 장면에서 저는 잠시 재생 버튼을 멈췄습니다. 왠지 모르게 자꾸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거든요. 그건 단순히 영화적 연출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불과 2년 전 겪었던 **'2024년 국군정보사령부 기밀 유출 사건'**의 잔상이 너무나 강력하게 겹쳐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누군가는 낯선 타국에서 이름도, 과거도 지운 채 '블랙 요원'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이 믿는 건 단 하나예요. "내가 여기서 목숨을 걸고 정보를 캐내면, 내 조국이 나의 등 뒤를 든든하게 지켜줄 것이다."라는 믿음 말이죠. 그런데 현실은 어땠나요? 우리 군의 해외 공작을 총괄하는 정보사 내부에서, 그것도 팀장급 군무원이 7년 동안이나 요원들의 신상 정보를 야금야금 빼돌리고 있었습니다.
영화 <휴민트> 속의 조 과장은 정보원의 희생에 눈물 흘리고 분노하지만, 현실에서의 배신은 훨씬 더 비겁하고 조용했습니다. 내부 직원이 무음 카메라로 기밀을 찍고, 개인 노트북에 담아 밖으로 나가는 동안 시스템은 완벽하게 침묵했습니다. 영화 속 악역인 황치성이 권력을 위해 발악하는 건 차라리 인간적인 욕망처럼 보일 정도예요. 현실의 배신자는 그저 돈 몇 푼에 수십 년간 쌓아온 국가의 안보 자산을, 그리고 동료들의 목숨값을 팔아넘겼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중국과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우리 요원들이 급히 짐을 싸서 귀국할 때, 그들이 느꼈을 허탈함이 영화 속 박건의 무너지는 표정에 투영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 배신자가 노트북을 들고 퇴근할 때마다, 해외의 이름 없는 영웅들은 사선을 넘나들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비릿하게 다가왔거든요. 류승완 감독이 굳이 '휴민트'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내세운 건, 시스템이 아닌 결국 '사람'이 망가뜨린 안보에 대한 통렬한 경고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휴민트'가 아닐까요?
영화가 끝날 무렵, 맥주는 이미 식어 있었고 건조기는 조용히 멈춰 서 있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신세경 배우가 연기한 채선화가 남긴 그 공허한 눈빛이 제 방 천장에 계속 맴돌더라고요. 사실 이 영화가 첩보물이라는 장르를 빌려왔지만, 결국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당신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당신 또한 누군가를 당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 말이죠.
문득 지난주에 회사 동료와 점심을 먹으며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어요. 그 친구가 제게 고민을 털어놨는데, 저는 그 진심에 공감하기보다 '이 정보를 나중에 어떻게 활용하면 내 업무에 도움이 될까'를 먼저 계산했던 제 모습이 떠올라 갑자기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 사회 자체가 거대한 '휴민트'들의 집합소잖아요.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인맥을 쌓고, 때로는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대방을 유도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 관계의 밑바닥에 '진심'이라는 안전장치가 없다면, 우리는 결국 2024년의 그 사건처럼 언제든 서로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괴물이 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도 혹시 저처럼 사람 관계에서 '이용'과 '신뢰'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지는 않나요? 영화 속에서 박정민 배우가 보여준 그 투박하고 어리석을 정도의 순애보가 평론가들에게는 '올드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저는 오히려 그 지점이 이 차가운 영화에서 유일하게 숨 쉴 구멍이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 설령 그게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선택일지라도 한 사람을 구하려 했던 그 마음이 없었다면 <휴민트>는 그저 흔한 첩보 액션 영화로 남았을 겁니다.
밤이 깊어지니 창밖으로 빗소리가 다시 들리네요. 내일 아침엔 아마 오늘보다 더 쌀쌀할 것 같아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오늘 하루 누군가의 '휴민트'로서 정보를 전달하고 관계를 맺느라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잠들기 전 한 번쯤은 거울 속의 자신에게 물어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오늘 누군가에게 진심이었나?"라고요.
영화는 2시간의 러닝타임을 끝으로 막을 내렸지만, 무너진 현실의 정보망을 다시 세우는 데는 수십 년의 세월과 수많은 사람의 헌신이 필요할 겁니다. 우리들의 관계도 마찬가지겠죠. 한 번 깨진 신뢰를 회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또다시 누군가를 믿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게 사람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니까요. 내일은 좀 더 따뜻하고 투명한 세상에서,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 없는 커피 한 잔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주말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명장면, 그리고 씁쓸한 현실의 잔상
살다 보면 우리도 비슷한 선택의 순간을 겪는 것 같아요. 꼭 국가적 차원이 아니더라도요. 회사에서, 관계에서, 때로는 아주 작은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수단’처럼 대할지, 아니면 그냥 한 사람으로 볼지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거든요.
여러분도 혹시 그런 순간을 겪은 적 있으신가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뭔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던 때 말이에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런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그날 밤, 빨래를 널면서 창문을 조금 열었는데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습니다. 손끝이 시릴 정도였는데, 이상하게 그 감각이 오래 남았어요. 아마도 영화 속 인물들이 느꼈을 차가움이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