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얼간이, 내 가슴의 소음을 잠재운 주문 '알 이즈 웰(All is Well)'

영화 세얼간이 포스터 이미지

내 가슴의 소음을 잠재운 주문, 알 이즈 웰(All is Well)

어제 퇴근길에 아파트 단지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를 봤거든요. 잎이 다 떨어져서 앙상한 게 꼭 제 모습 같더라고요. 요즘 들어 부쩍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분명 남들이 말하는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는데,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느낌... 다들 아시죠? 그런 날 있잖아요. 아무리 비싼 음식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 것 같고, 넷플릭스를 켜봐도 도무지 몰입이 안 되는 그런 날이요. 사실 제가 어제 그랬거든요.

냉장고 구석에 박혀 있던 김빠진 콜라 한 잔을 따라놓고 소파에 누웠는데, 문득 예전에 봤던 영화 <세 얼간이>가 떠오르더라고요. 왜 하필 그 영화였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그때 제가 느꼈던 그 답답함이, 영화 속 파르한과 라주가 느끼던 그 숨 막히는 공기랑 비슷해서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이 영화, 런닝타임이 170분이나 되잖아요. 인도 영화 특유의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들이 길어서 가끔은 "아, 이건 좀 너무 길다" 싶을 때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제는 그 긴 시간조차 짧게 느껴질 정도로 푹 빠져버렸습니다. 제가 왜 이 영화에 다시 매료됐는지, 그리고 제 삶의 어떤 조각들이 영화와 맞닿았는지 조곤조곤 수다를 한번 떨어보고 싶더라고요.

부모님의 지도와 내가 걷고 싶던 길 사이의 안개

영화 속 파르한의 아버지는 파르한이 태어날 때부터 "내 아들은 엔지니어가 될 거야!"라고 선언하셨잖아요. 그 장면을 보는데 갑자기 어릴 적 저희 집 거실 풍경이 툭 튀어나오더라고요. 제가 초등학교 고학년쯤 됐을 때였나, 아버지가 거실 벽에 '정직하게 살자'라는 가훈 옆에 뜬금없이 '법대 진학'이라는 글자를 써서 붙여놓으셨거든요. 그때 저는 법이 뭔지도 몰랐고, 그저 그림 그리는 게 제일 좋았던 꼬마였는데 말이죠.

파르한이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 하면서도 아버지의 화난 얼굴이 두려워 억지로 공대에 입학한 모습은 정말이지 남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저도 비슷했거든요. 미술 학원 대신 수학 학원에 앉아 정석 문제를 풀 때마다, 제 마음속 도화지는 점점 까매지는 느낌이었어요. 란초(아미르 칸)가 파르한에게 "너는 공학을 사랑하지 않아, 사진을 사랑하지"라고 직구를 던졌을 때, 화면 속 파르한은 울먹였지만 저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아, 이 부분은 제가 다시 봐도 가슴이 저릿하더라고요. 우리는 왜 사랑하는 걸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 그토록 큰 용기를 내야만 하는 걸까요?

라주(샤르만 조시)의 상황은 또 어떻고요. 가난한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족쇄. 저는 라주가 시험 전날 신들에게 기도하며 손가락마다 반지를 끼고 있던 장면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저도 중요한 프로젝트 발표 전날이면, 평소에는 가지도 않던 성당에 가서 촛불을 켜고 "제발 이번만 무사히 넘어가게 해주세요"라고 빌거든요. 그게 실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실패했을 때 나를 바라볼 사람들의 실망감이 무서워서 그런 거잖아요. 영화 속 란초는 "기계적으로 암기하지 말고 이해해라"라고 말하지만, 현실의 벽은 늘 '바이러스(Virus)' 교장 선생님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우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사실 영화 속에서 조이가 자살을 선택했을 때, 그게 단순히 영화적 장치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속이 곪아 터진 누군가의 마지막 비명처럼 들렸거든요.

탁월함을 쫓았을 때 정말 성공이 따라올까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화면이 검게 변했을 때, 저는 한동안 리모컨을 누르지 못했습니다. 란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 "성공을 쫓지 말고 탁월함을 추구하라(Pursue excellence, and success will follow, pants down)"는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거든요. 솔직히 말해서, 이 말에 100% 공감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아직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현실은 탁월한 사람보다 처세술이 좋은 사람이 더 빨리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으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가 저에게 준 여운은 그 성공의 유무가 아니었습니다.

란초가 심장을 톡톡 두드리며 "알 이즈 웰(All is Well)"이라고 외칠 때, 그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마법 같은 예언이 아니더라고요.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지만, 사실 별거 아니야. 진정해"라고 내 불안한 심장을 속이는 위로였던 거죠. 여러분도 혹시 그런 적 있으신가요? 분명 내일 아침에 해결해야 할 골치 아픈 일이 쌓여 있는데, 거울 속의 나에게 "괜찮아, 다 잘될 거야"라고 억지로라도 말해본 적요. 제가 어제 영화를 본 이유도 결국 누군가 저에게 그 말을 해주길 바랐던 것 같아요.

란초는 결국 정체가 밝혀진 뒤에 자기가 하고 싶던 교육을 마음껏 펼치며 살아가잖아요. 그 반전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란초 같은 천재가 아니어도 저런 삶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파르한이 아버지에게 용기를 내어 사진기를 들겠다고 말하는 그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결과가 성공이든 아니든, 내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얼간이'가 아닌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걸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지금 무언가에 눌려 숨이 막히신다면, 오늘 밤만큼은 란초의 무모함을 빌려 자신의 가슴을 한번 다독여보셨으면 좋겠어요. "야, 별거 아니야. 다 잘될 거야"라고요.

실화보다 더 지독한 인도의 교육 현실

이 영화를 그냥 '재미있는 코미디'로만 넘기기엔, 그 안에 담긴 팩트들이 꽤나 묵직합니다. 사실 <세 얼간이>는 '체탄 바갓'이라는 작가가 쓴 《Five Point Someone》이라는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어요. 작가 본인도 인도의 명문 공대인 IIT(인도 공과대학) 출신이라, 영화 속 바이러스 교장의 지독한 권위주의나 학생들의 처절한 경쟁은 실제 인도의 교육 현실을 그대로 투영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인도에서는 매년 수천 명의 학생이 성적 압박을 이기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란초라는 캐릭터가 인도 사회에서 그토록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이유도, 실현 불가능해 보일 만큼 완벽한 '자유의 상징'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아미르 칸은 이 영화 이후에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배우로 더 확고히 자리 잡았는데, 그는 란초를 통해 단순히 웃음을 주는 게 아니라 인도의 낡은 시스템을 부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특히 란초의 실제 모델로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소남 왕축(Sonam Wangchuk)'이라는 교육 혁신가인데, 그는 실제로 라다크 지역에서 기존의 주입식 교육이 아닌 실질적인 창의성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고 하네요. 영화적 허구인 줄만 알았던 '란초의 학교'가 현실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세 얼간이>가 주는 울림은 훨씬 더 단단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비현실적이라고 비판받던 란초의 철학이 누군가에게는 이미 현실의 언어였다는 사실, 참 멋지지 않나요?

글을 다 쓰고 나니 베란다 너머로 새벽 공기가 들어오네요. 어제 먹다 남은 콜라는 이제 완전히 김이 빠졌지만, 제 기분은 어제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란초, 파르한, 라주... 이 세 명의 얼간이가 제 방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에요.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바이러스' 교장 선생님을 마음속에 키우며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너는 부족해", "너는 경쟁에서 뒤처질 거야"라고 속삭이는 그 환청 말이에요. 하지만 가끔은 세상의 규칙을 무시하고 "알 이즈 웰"을 외치는 얼간이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남들이 비웃든 말든, 내가 좋아하는 사진기를 들고 내가 사랑하는 풍경 앞에 서는 것. 그게 바로 이 지독한 세상에서 탈출하는 가장 멋진 방법일지도 모르니까요.

아, 이제 슬슬 출근 준비를 해야겠네요. 넥타이를 맬 때 거울을 보며 살짝 속삭여보려 합니다. "야, 오늘도 알 이즈 웰이다!" 여러분의 하루도 오늘은 조금 덜 치열하고, 조금 더 얼간이처럼 즐거웠으면 좋겠습니다. 신발 끈을 묶는 손길에 조금은 힘이 들어가네요. 다들, 오늘도 무사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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