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음 한 장에 걸린 인생,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뒷모습, 영화 국가 부도의 날

영화 국가 부도의 날 포스터 이미지


어제는 퇴근길에 유난히 몸이 무겁더라고요. 편의점에 들러 평소엔 잘 마시지도 않는 캔맥주를 하나 샀습니다. 안주도 없이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맥주 캔을 따는데, 문득 TV에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방영해주더군요. 사실 이 영화, 개봉했을 때 영화관에서 보면서 참 많이 울컥했던 기억이 있거든요. 그런데 마흔이 다 된 지금 다시 보니 감회가 전혀 달랐습니다. 캔맥주의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데, 화면 속 김혜수 씨의 절박한 표정을 보니 제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더라고요. 저는 사실 그 당시 너무 어려서 경제가 무너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저 뉴스에서 연일 시끄러웠고,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저녁에 일찍 들어오시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좋아하던 반찬이 조금 줄었다는 것 정도만 기억하거든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 이 영화를 다시 보니, 그때 우리 부모님들이 짊어졌던 그 무거운 짐이 비로소 제 어깨 위로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어음 한 장에 걸린 인생,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뒷모습"

영화 속에서 허준호 씨가 연기한 '갑수'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가장입니다. 어음 한 장을 믿고 큰 계약을 따냈다고 좋아하며 아내에게 새 신발을 사다 주던 그 순박한 모습이, 제 기억 속의 아버지를 너무 닮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초등학생일 때, 아버지가 겨울 어느 날 붕어빵 봉투를 품에 안고 들어오셨던 적이 있어요. 평소보다 유난히 활짝 웃으시면서 "오늘 아빠가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갑수처럼 큰 계약을 따냈거나 월급이 밀리지 않고 나왔던 날이었을지도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영화 속 갑수는 국가 부도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그저 어음 한 장을 든 채 무너져 내립니다.

그 장면을 보는데 지난주에 대출 금리 인상 문자를 받고 한숨을 내쉬던 제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나라가 어렵다, 경제가 안 좋다는 말이 뉴스에서는 숫자와 그래프로만 나오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게 당장 내일의 장바구니 물가이고, 아이의 학원비이고, 삶의 희망을 꺾어버리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잖아요. 영화 속 유아인이 연기한 윤정학처럼 위기를 기회로 삼아 돈을 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우리네 이웃은 갑수처럼 그저 "버티는 것"조차 버거운 하루를 살아냈던 거죠. 사실 저는 금융 지식이 해박하지 않아서 조우진 씨와 김혜수 씨가 어려운 경제 용어로 대립할 때는 멍하니 영상에만 취해 있기도 했지만, 갑수가 무너져가는 공장에서 허망하게 서 있던 그 뒷모습만큼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게 바로 1997년을 살아낸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었을 테니까요.

"다시는 속지 않겠다는 다짐, 여러분은 안녕하신가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한시현(김혜수)의 마지막 대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위기는 반복된다"는 그 차갑고도 냉정한 경고 말이죠. 여러분도 혹시 저처럼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며 잠 못 드는 밤이 있으신가요? 1997년의 IMF 사태가 남긴 건 비단 금전적인 손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평생직장이라는 믿음이 깨졌고, 이웃을 믿기보다는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차가운 개인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됐죠. 저는 가끔 친구들과 술 한잔할 때 "요즘 살기 참 팍팍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그 팍팍함의 뿌리가 어쩌면 20여 년 전 그 추웠던 겨울에 닿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 속 한시현은 시스템의 벽에 부딪혀 패배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경고를 멈추지 않습니다. 저는 그 모습에서 묘한 위안을 얻었습니다. 거대한 파도를 막을 순 없어도, 적어도 눈을 감고 외면하지는 않겠다는 그 태도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서요. 사실 저도 요즘 주식이다 비트코인이다 해서 주변에서 "지금이 기회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본 뒤 빈 맥주 캔을 정리하며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과연 세상을 똑바로 보고 있나? 아니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나?"라고요. 독자 여러분도 한 번쯤 고민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평온함이 혹시 또 다른 위기의 전조는 아닌지, 그리고 우리는 그때처럼 또다시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되지는 않을지 말이죠.

1997년 그날의 기록, 영화가 담지 못한 차가운 진실들

이 영화는 '인천의 한 백화점에서 일어난 연쇄 부도' 같은 사소한 디테일부터, 당시 실제로 벌어졌던 굵직한 사건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영화 속에서는 정부 관료들의 무능함과 IMF의 고압적인 태도가 극적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역사는 훨씬 더 복잡하고 비정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외환보유액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고, 기업들은 빚더미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죠. 영화에서 뱅상 카셀이 연기한 IMF 총재의 요구 사항들—정리해고 허용, 금리 인상 등—은 실제로 한국 경제의 구조를 완전히 바꿔버린 결정들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영화 속에서 유아인이 베팅했던 '역베팅'이 실제로도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를 직감한 소수의 정보 기득권층은 달러를 사들이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킨 시발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반면, 우리 국민은 어땠나요? 영화에서는 짧게 지나가지만 실제로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해 집에 있던 돌 반지, 결혼반지를 꺼내 온 국민의 마음은 세계 경제학자들도 놀라게 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죠. 하지만 영화는 그 아름다운 공동체 의식 뒤에 숨겨진 차가운 현실을 지적합니다. 국민은 금을 모아 나라를 살리려 했지만, 그 희생의 대가는 결국 평범한 노동자들의 해고와 비정규직의 확산으로 돌아왔다는 씁쓸한 사실 말이에요. 이 영화가 단순한 신파를 넘어 '경제 스릴러'로서 가치를 지니는 건, 바로 이런 구조적인 모순을 날카롭게 꼬집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방 안에 밴 맥주 냄새를 빼려고 창문을 조금 열었습니다. 밤공기가 꽤 차갑네요. <국가부도의 날>을 보고 나면 마음 한편이 돌덩이를 얹은 듯 무겁지만, 역설적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힘이 생기기도 합니다. 영화 속 갑수가 살아남아 오늘날을 살아가는 노인이 되었듯, 우리도 지금의 이 힘겨운 파도를 어떻게든 넘겨야 하니까요. 여러분, 오늘 밤엔 부모님께 혹은 나 자신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보면 어떨까요? "그동안 버텨오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고요. 요약하자면 위기는 예고 없이 오지만, 그것을 견뎌내는 건 결국 옆 사람의 손을 놓지 않는 우리의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제 내일 출근을 위해 일기장을 덮고 자리에 누워야겠습니다. 꿈속에선 1997년의 그 추운 겨울이 아니라, 모두가 환하게 웃으며 맛있는 붕어빵을 나눠 먹는 따뜻한 봄날만 가득하길 바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