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 한 쪽을 나눠 끼는 순간, 세상은 나만의 무대가 됩니다, 비긴어게인

영화 비긴어게인 포스터 이미지

이 영화를 왜 보게 됐냐면요, 사실 아주 지질한 사연이 하나 섞여 있어요. 벌써 몇 년 전 일이네요. 주말 아침이었는데,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다 밀어 넣고 윙윙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마음이 텅 빈 것 같더라고요. 그때 마침 사귀던 사람과 심하게 다투고 연락도 안 하던 중이었거든요. "미안해" 한마디면 끝날 일이었는데,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끝까지 전화를 안 걸고 버텼죠. 그러다 홧김에 노트북을 켜고 아무 영화나 클릭한 게 바로 '비긴 어게인'이었어요.

솔직히 처음엔 그냥 예쁜 뉴욕 풍경이나 보면서 대리만족이나 하자는 심산이었거든요? 그런데 영화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댄(마크 러팔로)이 바에서 술에 취해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의 노래를 듣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제 뒤통수를 누가 세게 때리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레타의 노래에 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첼로가 연주되고 드럼이 비트를 맞추는 그 마법 같은 순간 말이에요. 그 장면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먹다 남은 식은 피자 한 조각을 입에 문 채로 멍하니 화면만 쳐다봤어요. "아, 나도 저렇게 누군가 내 진심을 알아봐 주길 바랐던 건가?" 싶더라고요.

영화를 보는 내내 뉴욕의 소음조차 음악이 되는 걸 보면서, 제 방안을 가득 채웠던 칙칙한 공기가 조금씩 걷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세탁기 다 돌아갔다는 알람 소리도 평소엔 그렇게 시끄럽더니, 그날은 왠지 그레타의 앨범에 들어갈 퍼커션 소리처럼 들리더라고요. 참 우습죠? 사람 마음이라는 게 영화 한 편에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다는 게요. 결국 영화 다 보고 나서 제가 먼저 문자 보냈거든요. "우리 그냥 영화 보러 갈래?"라고요.

이어폰 한 쪽을 나눠 끼는 순간, 세상은 나만의 무대가 됩니다

영화 속에서 댄과 그레타가 Y잭을 꽂고 뉴욕 거리를 걸으며 음악을 듣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저는 그 장면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요. 그레타가 그러죠. "음악은 평범한 순간조차 의미 있게 만든다"라고요. 그 대사를 듣는데 예전 고등학교 때 짝꿍이랑 이어폰 한 쪽씩 나눠 끼고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노래 듣던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때 들었던 노래가 뭐였는지는 가물가물한데, 그 이어폰 줄이 당겨질까 봐 고개를 조심스럽게 까닥이던 그 간질간질한 기분만큼은 생생해요.

사실 우리 삶도 그렇잖아요. 매일 똑같은 지하철역, 지겨운 사무실 책상, 퇴근길의 눅눅한 공기... 그런데 거기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 하나만 얹어져도 그 풍경이 180도 달라 보이거든요. 제가 작년 여름에 회사 일로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무작정 사표 던지고 싶었던 날이 있었어요. 그때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서 'Lost Stars'를 무한 반복으로 들으면서 창밖을 보는데, 평소엔 짜증 나던 퇴근길 정체 구간의 빨간 브레이크등이 무슨 크리스마스트리 전구처럼 예뻐 보이더라고요.

영화에서 댄과 그레타가 스튜디오 빌릴 돈이 없어서 뉴욕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녹음하는 모습은 정말 '찐'이었어요. 지하철 소음 때문에 아이들에게 돈을 쥐여주며 코러스를 부탁하고, 옥상에서 바람 소리를 담으며 노래하는 그 과정들요. 완벽하지 않아도, 오히려 그 투박한 소음들이 섞여야 진짜 '삶의 음악'이 된다는 걸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아, 이 부분은 제가 다시 봐도 참 대단한 연출인 것 같아요. 세련된 녹음실보다 지저분한 골목길에서 탄생한 음악이 더 큰 울림을 주는 법이니까요. 우리 인생도 너무 완벽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은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던 기억이 나네요.

사랑의 재결합보다 빛나는 '나 자신'과의 화해

많은 분이 이 영화의 결말을 보면서 데이브(애덤 르빈)와 그레타가 다시 잘되길 바랐을지도 몰라요. 저도 처음 봤을 때는 "아니, 저렇게 노래를 애절하게 부르는데 한 번만 용서해주지!" 하고 속상해했거든요. 특히 데이브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나와서 그레타가 선물한 'Lost Stars'를 관객들 앞에서 부를 때, 그 눈빛이 너무 진심 같아서 마음이 흔들리더라고요.

그런데 영화를 두 번, 세 번 다시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그레타가 자전거를 타고 공연장을 떠나며 짓던 그 미소의 의미를요. 그녀는 데이브를 미워해서 떠난 게 아니라, 더 이상 누군가의 '여자친구'나 누군가의 '뮤즈'가 아닌, 오롯이 '그레타' 자신으로 살기로 결심한 거였어요. 여러분도 혹시 저처럼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혹은 사랑받고 싶어서 나 자신의 진짜 색깔을 숨기고 살았던 적 없으신가요?

저는 예전에 연애할 때 제가 정말 싫어하는 매운 음식을 잘 먹는 척했던 적이 있어요. 상대방이 좋아하니까 매번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음, 맛있다" 하고 거짓말을 했죠. 결국 그 연애가 끝나고 나서야 제가 사실은 담백한 음식을 훨씬 좋아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을 때의 그 허망함이란... 영화 속 그레타가 데이브가 편곡한 화려한 버전의 노래를 들으며 이질감을 느꼈던 것도 아마 그런 마음이었을 거예요.

영화가 끝나고 나면 독자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부르는 '진짜 노래'를 좋아해 주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그들에게 맞춰준 '편곡된 노래'를 좋아하는 건지 말이에요. 만약 후자라면, 그레타처럼 과감하게 이어폰을 빼고 나만의 길을 찾아 떠날 용기가 필요할지도 몰라요. 물론 그 과정이 외롭고 두렵겠지만, 영화 속 댄과 그레타가 그랬던 것처럼 음악과 친구, 그리고 나 자신만 있다면 충분히 '다시 시작(Begin Again)'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뉴욕 거리가 거대한 녹음실이 된 이유, 그리고 실제 뒷이야기

이 영화를 만든 존 카니 감독은 전작 '원스'에서도 보여줬듯이, 음악이 가진 날것의 힘을 정말 잘 아는 사람이에요. 실제로 '비긴 어게인'의 제작 비하인드를 찾아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참 많더라고요. 영화 속에서 뉴욕 거리 곳곳을 누비며 녹음하는 설정은 단순히 연출이 아니라, 실제로 뉴욕 도심의 소음을 담아내기 위해 로케이션 촬영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해요.

특히 흥미로운 건 'Lost Stars'라는 곡의 탄생 배경이에요. 이 곡은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지만, 사실 예술성과 상업성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기 위해 두 가지 버전으로 존재하죠. 그레타의 잔잔한 어쿠스틱 버전과 데이브의 화려한 팝 버전 말이에요. 이건 실제로 음악 산업 내에서 창작자들이 겪는 고민을 그대로 반영한 거래요.

또한, 키이라 나이틀리는 이 영화 전까지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남편인 제임스 라이튼(밴드 클락슨스의 멤버)에게 기타를 배우며 엄청나게 연습했다고 하더라고요. 영화 속에서 그녀가 조금 수줍게, 하지만 진심을 담아 노래하는 그 특유의 톤이 탄생한 비결이 바로 거기 있었던 거죠. 애덤 르빈 역시 마룬 5의 보컬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 이 영화에 출연했는데, 출연료를 거의 받지 않고 참여할 정도로 시나리오에 반했다고 해요. 진짜 음악인들이 모여 만든 영화라 그런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Lost Stars'는 매년 가을만 되면 차트를 역주행하는 스테디셀러가 된 게 아닐까 싶네요.

영화가 다 끝나고 나면, 왠지 모르게 운동화 끈을 꽉 조여 매고 밖으로 나가고 싶어 져요. 거창한 목적지가 없어도 좋아요. 그냥 이어폰을 끼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걷는 것만으로도, 지루했던 우리 동네 골목길이 영화 속 뉴욕 한복판처럼 느껴질 수 있으니까요.

집에 돌아와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널면서 생각했습니다. 오늘 내 인생의 사운드트랙은 어떤 곡이었을까 하고요. 어쩌면 조금 우울한 발라드였을지도 모르고, 가끔은 정신없는 헤비메탈 같았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어떤 곡이었든 상관없어요. 그레타의 말처럼 음악이 우리 삶의 아주 평범한 순간조차 진주처럼 반짝이게 만들어줬을 테니까요.

여러분은 오늘 어떤 노래로 하루를 채우셨나요? 혹시 지금 이 글을 읽으며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면, 고민하지 말고 바로 재생 버튼을 눌러보세요. 그리고 그 선율에 기대어 오늘 하루의 먼지를 툭툭 털어내 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제 다 마른 빨래를 개면서, 그레타가 마지막에 보여준 그 후련한 미소를 한 번 따라 해 보려고요. 내일은 또 내일의 새로운 노래가 시작될 테니까요.

혹시 이 영화를 보면서 저처럼 울컥했던 명곡이 있으신가요? 저는 사실 'Tell Me If You Wanna Go Home'의 그 옥상 녹음 장면을 제일 좋아하거든요. 여러분의 마음을 흔들었던 '비긴 어게인'의 원픽은 무엇인지 댓글로 나눠주세요. 우리 같이 이어폰 한 쪽씩 나눠 끼는 기분으로 이야기 나눠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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