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밖에 모르는 바보가 가르쳐준 멈추지 않는 법, 포레스트 검프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다지만, 때론 쓴맛만 골라 먹는 우리에게
비가 와서 창문 여는 소리가 들리는 방 안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빗소리가 규칙적으로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속에 묵혀두었던 해묵은 고민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오르더라고요. 어제 퇴근길 편의점에서 4캔에 만 원 하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가격의 수입 맥주를 사 왔는데, 그걸 한 캔 따서 소파에 깊숙이 파묻혔습니다. 사실 지난주에 친한 친구랑 사소한 말다툼을 하고 아직 화해를 못 했거든요. 먼저 사과를 할까 말까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내려놓고 리모컨을 들었습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바로 <포레스트 검프>였어요.
이 영화를 왜 다시 보게 됐냐면요, 요즘 제 삶이 너무 '계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일을 하든 "이게 나한테 이득이 될까?"를 먼저 따지는 제 모습이 문득 징그럽게 느껴질 때가 있더라고요. 어릴 적 아버지가 퇴근길에 사 오셨던 붕어빵 봉투의 그 뜨끈한 온기처럼, 아무 계산 없이 누군가를 위하고 사랑했던 기억이 언제였나 싶기도 하고요. 지능지수는 조금 낮을지 몰라도 세상 그 누구보다 정직하게 발을 내딛는 포레스트의 뒷모습이 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줄거리가 너무 유명해서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지만, 이상하게 나이가 들수록 이 영화는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상처 입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달리기밖에 모르는 바보가 가르쳐준, 멈추지 않는 법
영화 속에서 어린 포레스트가 다리 보조기를 차고 아이들에게 쫓기다가 "포레스트, 달려!(Run, Forrest, Run!)"라는 제니의 외침에 보조기를 부수며 달려나가는 장면은 언제 봐도 가슴이 뻥 뚫립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작년 여름 우리 집 천장이 샜던 기억이 났어요. 뜬금없죠? 그때 윗집이랑 보상 문제로 얼굴을 붉히고, 일은 안 풀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강까지 안 좋아져서 정말 '인생 왜 이래?' 싶었거든요. 그때 저를 버티게 한 건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그냥 매일 아침 억지로라도 운동장 한 바퀴를 뛰었던 그 무식한 꾸준함이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대학 미식축구 선수가 되고, 베트남 전쟁의 영웅이 되고, 탁구 국가대표까지 되지만 본인은 정작 자기가 왜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냥 하라고 하니까, 혹은 친구 버바와의 약속이니까, 아니면 그냥 눈앞에 공이 보이니까 하는 거죠. 저는 이 '단순함'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느라 시작조차 못 할 때가 많잖아요. "이거 해봤자 안 될 텐데", "남들이 비웃으면 어쩌지?" 같은 생각들 말이에요. 포레스트가 댄 중위(게리 시니스)를 불길 속에서 구해냈을 때, 댄 중위는 왜 자기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냐고 분노하죠. 훈장 따위는 관심도 없고 그저 전우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던 포레스트의 그 투명한 눈빛 앞에서, 저의 비겁한 계산들이 참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영화 중반에 포레스트가 3년 넘게 미국 전역을 달리는 장면은 제가 다시 봐도 잘 이해가 안 가네요. 그냥 달리고 싶어서 달렸다는데,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추종자가 "우리의 희망이다", "메시지를 달라"며 아우성치는 모습은 참 아이러니하더라고요. 정작 주인공은 배고프면 먹고 잠오면 자고 가고 싶으면 가는 건데, 세상은 자꾸만 그에게 어떤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죠. 제가 블로그에 글을 쓸 때도 가끔 그래요. 사람들에게 뭔가 대단한 정보를 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서 정작 제 진짜 이야기는 놓치고 마는 것 같은 느낌? 포레스트는 그런 제 어깨를 툭 치며 "그냥 해봐, 별거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상처받은 제니와 기다림에 지치지 않는 포레스트, 그리고 우리
포레스트의 인생이 찬란한 성공담이라면, 그의 첫사랑 제니(로빈 라이트)의 인생은 지독하게 아픈 성장통 같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았던 상처를 안고 평생을 방황하는 제니를 보면서, 저는 마음 한구석이 아릿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저처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보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에게 더 끌렸던 적이 있으신가요? 제니는 포레스트의 순수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는지, 자꾸만 그를 떠나 위험한 세상 속으로 자신을 던집니다. 60년대 히피 문화와 마약, 반전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망가져 가는 제니의 모습은 당시 미국 사회의 아픈 자화상이기도 하죠.
많은 사람이 제니를 비난하기도 하더라고요. "포레스트를 이용만 하고 떠났다"고요. 하지만 저는 제니가 너무 이해가 갔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사랑이 무서운 법이거든요. 너무 깨끗하고 맑은 포레스트 곁에 있으면 자신의 더러운 얼룩이 더 도드라져 보이니까 자꾸만 도망치고 싶었을 거예요. 영화 후반부에 제니가 고향 집으로 돌아와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의 빈 집을 향해 돌을 던지며 오열하는 장면은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옆에서 포레스트가 하는 말이 있죠. "때로는 던질 돌이 충분하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야." 아... 이 대사는 정말 인공지능은 절대 쓸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위로라고 생각해요.
결국 제니는 돌아오고, 두 사람은 짧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제니가 떠난 후 혼자 아들을 키우며 제니의 무덤 앞에 선 포레스트의 뒷모습을 보며 저는 맥주 캔을 내려놓고 참았던 눈물을 좀 쏟았습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던 어머니의 말처럼, 그는 정말 어떤 맛이 나올지 모르는 상자에서 쓴맛, 단맛을 다 보았죠. 하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어진 오늘을 살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할 뿐이죠. 독자 여러분은 지금 어떤 맛의 초콜릿을 씹고 계신가요? 혹시 너무 써서 뱉고 싶다면, 포레스트처럼 그냥 조금 더 오래 씹어보는 건 어떨까요. 언젠가는 그 속에 숨겨진 달콤한 아몬드 같은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요.
역사의 파도 속에 깃털처럼 던져진 한 인간의 기록
이 영화가 단순한 감동 드라마를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명작이 된 데에는 기술적인 혁신과 철저한 고증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는 1994년 당시로는 획기적이었던 CG 기술을 활용해 포레스트 검프를 실제 역사적 현장에 집어넣었죠.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존 레논과 나란히 앉아 인터뷰를 하며, 워터게이트 사건을 우연히 폭로하는 장면들은 지금 봐도 이질감이 거의 없습니다. 제작진은 실제 아카이브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분석해서 톰 행크스의 입 모양과 시선을 맞추는 수작업을 거쳤다고 하니, 그 집요함이 정말 대단하죠.
재미있는 사실은 원작 소설에서의 포레스트는 영화보다 훨씬 더 거칠고 냉소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몸집도 거구였고 언어 구사도 더 투박했죠. 하지만 에릭 로스의 각본과 톰 행크스의 섬세한 연기가 만나면서 우리가 아는 그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포레스트가 탄생했습니다. 또한 영화에 흐르는 60~70년대 올드팝들은 그 시대를 직접 겪지 않은 세대에게도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짐 모리슨의 목소리나 조안 바에즈의 노래가 흐를 때, 영화는 단순히 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격동의 미국 현대사를 증언하는 다큐멘터리가 되기도 합니다. 이 영화가 왜 보수적인 가치관을 대변하느냐, 혹은 진보적인 시각이냐를 두고 평론가들이 치열하게 싸우기도 했지만, 정작 관객들은 그런 이데올로기보다 "그냥 열심히 사는 사람"에 대한 보편적인 애정에 더 열광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맥주 캔도 비었고 빗소리도 조금 잦아들었네요. 영화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하얀 깃털이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 인생도 그 깃털처럼 어디로 날아갈지 알 수 없는 존재겠죠. 어떤 바람이 불어올지, 어디에 내려앉을지 우리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포레스트처럼 묵묵히 걷다 보면 그 바람조차 내 삶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내일은 출근길에 지난주에 다퉜던 친구에게 먼저 전화를 해보려고 합니다. "인생 별거 있냐, 붕어빵이나 한 봉지 사갈게"라고 말하면서요. 포레스트라면 아마 그렇게 했을 것 같거든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요. 아, 빨래가 다 돌아갔다는 알림음이 울리네요. 축축한 빨래를 널면서 오늘 본 하얀 깃털 같은 여운을 좀 더 간직해봐야겠습니다. 여러분도 초콜릿 상자 속에서 꼭 맛있는 맛을 고르시길 바랄게요. 혹시 쓴맛이 걸렸더라도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요. 그게 다 인생이더라고요. 그럼, 전 이만 빨래 널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