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캔스피크, 차가운 세상에 옥분이 건넨 뜨거운 진심, 가장 위대한 증거가 된 평범한 대답, 영화보다 더 뜨거웠던 실제 팩트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오후 4시의 늘어진 햇살이 책상 위에 놓인 제 낡은 필통을 비추는데, 그 순간의 먼지 입자들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더라고요. '아, 이 공기, 어디선가 느껴본 적 있는데' 싶던 찰나에 머릿속을 스치고 간 게 바로 이 영화 <아이 캔 스피크>(I Can Speak)였습니다.
이 영화를 꺼내 든 건 정말 사소한 기억 때문이었어요. 아침에 대학교 전공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에 들어갔는데, 교수님이 출석을 부르시다가 제 이름을 잘못 부르셨거든요. 그때 "네!"라고 대답하면서 문득, 내 이름을 누군가 제대로 불러준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부르지 못한 채 수십 년을 숨죽여 살아온 분들이 계시잖아요.
저는 지금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가끔은 복잡한 마케팅 이론보다 우리 옆집 할머니의 투박한 잔소리 한마디에 더 큰 진리가 담겨 있다는 걸 느끼곤 합니다. 영화 속 옥분 할머니(나문희)가 구청을 제집 드나들듯 하며 민원을 쏟아붓는 모습이, 처음에는 그저 고집 센 어른의 행동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 숨겨진 '외로움'과 '기억'의 무게를 알게 된 순간 저는 강의실에서 몰래 훔쳐보던 영화 한 조각에 마음을 다 뺏겨버렸습니다.
"라면은 끓여 먹는 것이여", 차가운 세상에 옥분이 건넨 뜨거운 진심
영화 속에서 민재(이제훈)의 동생 영재가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갈 때, 민재는 가슴이 철렁했을 거예요. 저도 예전에 제 남동생이 중학생 때 학원 안 가고 오락실에 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딱 그런 기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니 영재가 향한 곳은 옥분 할머니의 수선집이었죠. 생라면을 부셔 먹던 아이에게 "라면은 끓여 먹는 것이여"라며 투박하게 밥을 챙겨주던 할머니의 모습에서, 저는 8년 전 돌아가신 저희 외할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취업 준비하느라 밥도 못 챙겨 먹고 다닐 때, 할머니는 항상 검정 비닐봉지에 갓 찐 감자를 담아 제 자취방 문고리에 걸어두곤 하셨거든요. 그 봉투에서 올라오던 뜨끈한 온기가 영화 속 옥분의 밥상에서 그대로 느껴지더라고요.
[아, 이 부분은 제가 다시 봐도 참 이해가 안 가면서도 경이로워요. 어떻게 그렇게 꼬질꼬질한 시장통 수선집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담아냈는지 말이죠. 사실 줄거리가 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나문희 선생님의 그 능청스러우면서도 슬픈 눈빛에 취해 있었습니다.] 사실 이 영화가 특별한 건 '위안부'라는 거대한 역사의 비극을 처음부터 앞세우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대신 그 거대한 고통을 짊어진 한 인간이 오늘날 우리 곁에서 어떻게 숨 쉬고 있는지를 아주 사소한 일상으로 보여줍니다. 옥분이 왜 영어를 그렇게 배우고 싶어 했는지, 왜 그렇게 민원에 집착했는지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은 꼭 제 마음의 빗장을 하나씩 푸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대학 생활이 힘들어서 교수님께 반항 섞인 리포트를 제출했던 날, 나중에 알고 보니 교수님이 제 가정 형편을 알고 몰래 장학금을 신청해주셨던 걸 알게 됐을 때 느꼈던 그 미안함과 고마움의 감정이 민재의 얼굴에서 그대로 읽히더라고요.
"I'm fine, thank you, and you?", 가장 위대한 증거가 된 평범한 대답
영화의 절정인 미국 하원 청문회 장면은 다시 봐도 전율이 돋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온 미첼 할머니의 증언 후에 옥분이 연단에 섰을 때, 그 정막은 정말이지 제 방 안의 공기마저 멈추게 하는 것 같았어요. 일본 측 의원들이 증거가 없다고 비웃을 때, 민재가 청문회장에 나타나 "How are you, 옥분?"이라고 외치는 그 순간...
[이 지점은 제가 몇 번을 다시 돌려봐도 늘 새로운 감정이 들더라고요. 누군가를 깊이 지지한다는 것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목소리가 된다는 게, 참 아프면서도 피할 수 없는 진실 같거든요.] 옥분이 "I'm fine, thank you, and you?"라고 대답할 때, 그건 단순한 영어 교과서 속 문장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고, 당신들의 사과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가장 강력한 생존 신고였죠. 저는 그 장면을 보다가 작년 여름, 저희 동네 시장에서 용역 업체와 싸우던 떡볶이집 아주머니가 떠올랐습니다. 다들 고개를 돌릴 때, 아주머니는 "나 여기 30년 살았어! 내가 증거야!"라고 소리치셨거든요. 옥분이 자신의 배에 남은 흉터를 보여주며 "내가 바로 증거다"라고 외칠 때, 저는 제 방 침대 끝에 앉아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역사는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곁에서 밥을 먹고 수선을 하고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몸속에 새겨져 있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았거든요.
영화가 끝나고 화면이 어두워졌을 때, 저는 리모컨을 내려놓지 못하고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 속 진주댁이 옥분에게 "그 긴 세월을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냐"며 울어주던 장면이 자꾸 맴돌았어요. 여러분도 혹시 저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의 아픔을 너무 늦게 알아차려 미안했던 적이 있으신가요? 혹은 세상이 당신을 외면할 때 누군가 건넨 따뜻한 안부 한마디에 삶을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으신 적은요? 옥분의 목소리는 이제 우리 모두의 목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용수 할머니와 HR121, 영화보다 더 뜨거웠던 실제 팩트
이 영화는 허구가 아니라 2007년 미국 하원에서 통과된 '일본군 위안부 사과 결의안(HR121)' 청문회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옥분 할머니의 실제 모델은 이용수 할머니이시고, 미첼 할머니의 모델은 네덜란드계 호주인 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입니다. 실제로 이용수 할머니는 청문회장에서 일본 측 의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하셨고, 이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속 마이클 리 의원의 모티브가 된 '마이크 혼다' 전 하원 의원입니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 결의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키는 데 앞장섰죠. 또한 영화 제목인 "I Can Speak"는 실제 청문회 당시 의장이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의 답변에서 착안했지만, 영화는 이를 일상적인 안부와 연결해 더 깊은 감동을 끌어냈습니다. 영화 속 옥분 할머니의 수선집이 위치한 '명진구'는 가상의 구역이지만, 촬영은 부산의 전통 시장에서 진행되어 그 특유의 정겨운 분위기를 살렸다고 하네요.
요약하자면... 아니, 이런 말은 왠지 옥분 할머니에게 어울리지 않네요. 그냥 일기장을 덮듯, 혹은 강의실 문을 열고 나가는 학생의 혼잣말처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영화 마지막에 옥분이 샌프란시스코 입국 심사에서 "English?"라는 질문에 "Of course"라고 대답하며 웃는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었던 과거를 딛고, 이제는 전 세계를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건넬 준비가 된 한 인간의 당당함. 저는 내일 아침 구내식당에서 매일 마주치는 영양사 아주머니께 조금 더 다정하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해 보려고 합니다. 그분의 하루가, 그분의 이름이 오늘보다 조금 더 빛날 수 있도록 말이죠.
여러분도 오늘은 가만히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물어봐 주세요. "How are you?" 그리고 기쁘게 대답하시길 바랍니다. "I'm fine!"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