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수프, 사랑한다는 말 대신, 정성껏 끓여낸 육수 한 국자
어제 저녁에는 유난히 속이 헛헛하더라고요. 배가 고픈 건 아닌데,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아서 냉장고를 뒤적이다가 지난번에 사다 둔 무를 꺼냈습니다. 딱히 대단한 걸 만들 재주도 없으면서, 그냥 칼날이 도마에 부딪히는 '탁탁' 소리가 듣고 싶었던 것 같아요. 무를 썰어 국을 끓이는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걸 보니 문득 얼마 전 본 영화 <프렌치 수프>가 생각났습니다. 사실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아주 우연이었어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주말 오후, 창문을 조금 열어두니 빗소리가 방 안까지 들려오는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뭔가 따뜻하고, 소란스럽지 않으면서도 깊은 맛이 나는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만난 이 영화는 제 기대보다 훨씬 더 진하고, 어쩌면 조금은 씁쓸한 삶의 뒷맛까지 보여주었죠.
"사랑한다는 말 대신, 정성껏 끓여낸 육수 한 국자"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대사도 거의 없이 주방에서 요리하는 모습만 20분 넘게 이어지거든요. 고기를 굽고, 채소를 다듬고, 소스를 졸이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마치 정교한 춤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걸 보는데 뜬금없이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어요. 어릴 적 시골집에 가면 할머니는 항상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며 커다란 솥에 뭔가를 끓이고 계셨죠. "왔냐" 한마디 툭 던지시고는 갓 지은 밥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 한 그릇을 내어주시던 그 투박한 손길 말이에요. 할머니는 한 번도 저에게 사랑한다거나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신 적이 없지만, 그 국물 한 숟가락에 담긴 온기가 사랑이었다는 걸 영화 속 외제니와 도댕을 보며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도댕 부팡은 미식가이고 외제니는 그의 곁에서 20년간 요리를 해온 파트너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은 화려한 보석이나 거창한 약속이 아니에요. 그저 상대방이 좋아하는 식재료를 고르고, 가장 완벽한 온도로 음식을 내놓는 것. 그거면 충분한 거죠. 사실 저도 예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처음으로 서툰 요리를 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레시피를 몇 번이나 정독하고, 간이 맞나 안 맞나 수십 번을 떠먹어보며 가슴 졸이던 그 마음. 영화 속 도댕이 외제니를 위해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만찬을 준비하는 장면을 볼 때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라고요.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 맛있는 음식을 넣어주고 싶다는 그 순수한 욕망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영화는 조용히 하지만 힘 있게 보여줍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당신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공기는 조금씩 차가워집니다. 외제니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 활기찼던 주방에도 그림자가 드리우죠. 그런데 참 신기한 건, 그 슬픔조차도 너무나 아름답게 그려진다는 거예요. 마치 잘 익은 과일이 떨어지기 직전 가장 달콤한 향을 내뿜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인생의 가을에 와 있다"는 도댕의 대사가 가슴을 쿡 찔렀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인생의 어떤 계절을 지나고 계신가요? 혹시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느라,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정성껏 차려준 마음의 식탁을 그냥 지나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방 안에는 여전히 빗소리가 들리고, 저는 괜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엄마, 오늘 뭐 먹었어?"라고요. 대단한 고백은 아니었지만, 그 질문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 표현이었던 것 같아요. <프렌치 수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함께 식탁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나누어 먹는 그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완성되는 거라고요. 여러분도 혹시 마음이 허기진 날이 있다면, 누군가를 위해 혹은 나 자신을 위해 정성스러운 한 끼를 준비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 따뜻한 온기가 생각보다 큰 힘이 되어줄지도 모르니까요.
19세기 프랑스 미식의 황금기, 벨 에포크의 주방을 엿보다
이 영화는 단순히 요리 영화라고 하기엔 그 깊이가 남다른데, 알고 보니 실존 인물과 소설에서 영감을 얻었더라고요. 마르셀 루프의 소설 『미식가 도댕 부팡의 삶과 열정』을 원작으로 하는데, 영화 속 도댕 부팡은 19세기 프랑스 미식의 대가였던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합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그분 말이죠.
재미있는 건 이 영화에 실제 미슐랭 셰프인 피에르 가니에르가 요리 자문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출연까지 했다는 사실입니다. 어쩐지 요리하는 손길이 예사롭지 않다 했어요. 1885년 프랑스, 이른바 '벨 에포크'라 불리는 그 풍요롭고 아름다웠던 시대의 주방을 재현하기 위해 CG 하나 없이 실제 식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했다고 하니, 그 생동감이 화면 밖까지 전해지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트란 안 훙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시간'을 조리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정말로 영화를 보는 내내 19세기 프랑스의 어느 고성 주방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정교하고 우아한 연출이 돋보였습니다.
주방 정리를 대충 마치고 나니 어느새 밤이 깊었네요. 무국 냄새가 은은하게 밴 거실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프렌치 수프>는 화려한 액션도, 반전도 없지만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조용히 일깨워주는 영화예요. 지금 여러분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과 마주 앉아 따뜻한 차 한 잔 나누는 시간, 그게 바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만찬이 아닐까요? 저는 이제 내일 아침에 먹을 국을 한 번 더 데워놓고 잠자리에 들려 합니다. 꿈속에서는 저도 도댕과 외제니가 만든 그 마법 같은 수프 한 그릇을 맛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여러분도 오늘 밤, 부디 배부르고 따뜻한 꿈 꾸시길 바랍니다. 마음속에 품어둔 사랑이 식지 않도록, 내일은 꼭 그 온기를 나누어 보세요.
[프렌치 수프: 요리로 쓴 가장 아름다운 연애 편지] 입맛을 돋우는 롱테이크 요리 장면과 쥘리에트 비노슈의 섬세한 연기! 19세기 프랑스 미식의 정점을 담아낸 이 영화가 사랑을 표현하는 독특한 방식을 제 삶의 조각들과 함께 엮어보았습니다. 마음의 허기를 채워줄 따뜻한 인생 에세이, 지금 맛보러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