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 고속도로 위의 탭댄스와 내 방 안의 눅눅한 빨래 사이
어제 퇴근길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를 마시며 문득 거실 창밖을 내다봤는데,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보랏빛으로 번져 보이더라고요. 그 순간 마법처럼 이 영화의 첫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사실 요새 제 기분이 좀 그랬거든요. 분명히 열심히 살고는 있는데,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나 싶은 그런 막연한 불안함 말이에요. 지난주에 친한 친구와 사소한 오해로 다투고 아직 화해하지 못한 찝찝한 마음까지 더해지니, 뭔가 현실을 잊게 해줄 화려한 자극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주말 아침, 산더미처럼 쌓인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다 돌려놓고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다시 이 영화를 틀었습니다.
처음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을 때는 단순히 "노래가 참 좋다", "색감이 예쁘다" 정도의 감상이었던 것 같은데, 서른을 넘기고 다시 마주한 느낌은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오프닝의 그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서 사람들이 차 위로 뛰어올라 춤을 추는 장면을 보는데, 예전엔 그저 신나기만 했던 그 가사가 이번에는 다르게 들렸어요. "또 다른 태양의 날(Another Day of Sun)"이라는 말이,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을 견뎌내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처절한 응원가처럼 느껴졌거든요. 사실 그레타 거윅... 아, 아니죠. 엠마 스톤이 연기한 미아가 오디션에서 계속 떨어지고 카페에서 서빙하며 꿈을 꾸는 모습은, 지금 제 처지와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서 더 마음이 쓰였던 것 같아요.
영화 중반부,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두 사람이 공중으로 떠올라 춤을 추는 장면은 사실 줄거리가 잘 기억 안 날 정도로 영상미에 취해 멍하니 바라만 봤습니다.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랑에 빠진 순간만큼은 우리 모두가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기분을 느끼잖아요. 저도 예전에 첫사랑과 남산 타워에 올라가 야경을 보며 "세상 모든 불빛이 다 우리를 축복해주는 것 같아"라고 속삭였던 유치한 기억이 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그땐 정말 그게 진실이라고 믿었거든요. 캔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며 창밖을 보니, 영화 속 LA의 노을만큼은 아니더라도 서울의 밤풍경도 제법 근사해 보였습니다.
고속도로 위의 탭댄스와 내 방 안의 눅눅한 빨래 사이
영화 속 미아가 반복되는 오디션 탈락에 지쳐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짐을 싸는 장면을 보는데, 갑자기 작년 여름 우리 집 천장이 샜던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때 정말 밖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집 안에서는 대야를 받쳐놓고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 인생도 이 천장처럼 구멍이 난 건가" 싶어 엉엉 울었거든요. 미아가 느꼈을 그 막막함과 좌절감이, 젖은 천장지를 바라보던 제 마음과 연결되면서 영화 속 상황이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졌어요. 세바스찬이 자신의 음악적 신념을 굽히고 돈을 벌기 위해 원치 않는 밴드에 들어갔을 때, 미아와 다투던 장면도 그랬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열정을 가진 것에 끌리게 되어 있어"라고 말하던 그녀의 진심이,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제 방까지 들리는 것 같았거든요.
저도 예전에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지만, 당장의 월세와 생활비 때문에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무직 일을 시작했거든요. 처음엔 "딱 1년만 돈 벌고 다시 꿈을 찾자"라고 다짐했지만, 어느덧 몇 년이 훌쩍 지나버린 제 모습을 보니 세바스찬의 그 씁쓸한 표정이 남 일 같지 않더라고요. 어릴 적 아버지가 퇴근길에 사 오셨던 붕어빵 봉투의 온기가, 사실은 가장으로서의 고단함을 꾹꾹 눌러 담은 무게였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어른이 되어서일까요. 라라랜드의 화려한 원색 드레스와 경쾌한 재즈 선율 뒤에 숨겨진 그 지독한 고독이 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제가 다시 봐도 잘 이해가 안 가네요. 왜 우리는 가장 빛나는 순간에 가장 아픈 선택을 해야만 하는 걸까요? 미아와 세바스찬이 언덕 위에서 "A Lovely Night"을 부르며 춤을 출 때,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이토록 엇갈릴 거라는 걸 꿈에도 몰랐겠죠. 마치 제가 첫 직장에 출근하던 날, 세상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처럼요. 하지만 현실은 영화처럼 늘 해피엔딩이 아니고, 우리는 때로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놓아야만 내 꿈을 잡을 수 있는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지독한 아이러니가 영화 내내 흐르는 재즈 선율처럼 제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영화의 마지막 10분, "What if" 시퀀스는 정말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세바스찬이 피아노 앞에 앉아 그들의 테마곡을 연주하기 시작할 때, 카메라는 순식간에 과거로 돌아가 우리가 바랐던 모든 '만약에'를 보여주잖아요. 만약 그가 처음 만난 날 그녀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았다면, 만약 그녀가 첫 1인극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면, 만약 두 사람이 함께 파리로 떠났다면... 이 장면을 보며 여러분도 혹시 저처럼 "그때 그랬다면 어땠을까" 하는 기분을 느낀 적 있으신가요?
저는 예전에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았던 인연이 있었는데, 제 고집 때문에 결국 헤어지게 됐거든요. 가끔 비가 와서 창문 여는 소리가 들리는 조용한 밤이면, 그때 제가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상상하곤 해요. 라라랜드의 마지막은 그 잔인한 상상을 가장 아름다운 영상으로 구현해내며 우리에게 묻는 것 같아요. "비록 지금 함께 있지 않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실패한 걸까?"라고요. 5년 뒤, 유명한 배우가 된 미아와 자신의 재즈바를 차린 세바스찬이 눈이 마주쳤을 때, 서로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 장면... 아, 이 부분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교차하더라고요.
그건 미련이라기보다, "덕분에 내가 이만큼 성장했어, 고마워"라는 성숙한 작별 인사였겠죠. 사랑의 성취보다 더 중요한 건,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변했는가 하는 문제라는 걸 이 영화는 말해줍니다. 세바스찬의 재즈바 이름인 'Seb's'의 로고를 미아가 디자인해준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걸 보며, 비록 곁에 없어도 서로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 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혹시 그런 'Seb's' 같은 공간이 하나쯤 있나요? 누군가는 꿈으로, 누군가는 사람으로 채워진 그 작고 소중한 비밀의 방 말이에요.
데이미언 셔젤의 집요함과 재즈를 향한 헌사
라라랜드는 단순히 로맨틱한 영화를 넘어, 감독 데이미언 셔젤이 '재즈'와 '고전 할리우드 뮤지컬'에 바치는 지독한 러브레터입니다. 실제로 이 영화는 1950년대 뮤지컬 영화들의 향수를 그대로 담아내기 위해 '시네마스코프' 비율로 촬영되었고, 화면 속의 강렬한 원색들은 잭슨 폴락의 액션 페인팅이나 마티스의 색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해요. 사실 영화 제작 초기에는 이런 뮤지컬 장르가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수많은 제작사로부터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요. 감독 스스로가 미아처럼 수없는 오디션(제작 미팅)에서 탈락하는 경험을 했던 셈이죠.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오프닝의 고속도로 시퀀스입니다. 이 장면은 실제로 LA의 105번과 110번 고속도로가 만나는 고가도로를 폐쇄하고 이틀 동안 촬영했는데,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100명이 넘는 무용수들이 실제 차 위를 뛰어다니며 원테이크처럼 보이게 완성해냈습니다. CG를 거의 쓰지 않고 인간의 몸짓으로 그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어쩌면 "꿈을 꾸는 바보들을 위한 찬가"라는 영화의 메시지를 가장 잘 증명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어요.
주연 배우인 라이언 고슬링 역시 전문 대역 없이 모든 피아노 연주 장면을 직접 소화하기 위해 3개월 동안 매일 2시간씩 연습했다고 하네요. 그가 연주하는 재즈 선율이 유독 진실되게 느껴졌던 건 그런 집요한 노력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또한 영화 곳곳에는 《카사블랑카》나 《이유 없는 반항》 같은 고전 명작들에 대한 오마주가 숨어 있어, 영화 팬들에게는 보물 찾기 같은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이런 팩트들을 알고 다시 영화를 보면, 화려한 조명 아래 깔린 제작진의 땀방울이 보이는 것 같아 경외심까지 들더라고요.
빨래 건조대에 옷을 하나하나 널면서 영화 속 노래를 흥얼거려봅니다. 'City of Stars, are you shining just for me?'라는 가사가 눅눅한 수건 사이로 스며드는 기분이에요. 영화 한 편이 우리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오늘 밤 제 마음의 온도는 1도쯤 올려준 것 같습니다.
비록 미아처럼 대스타가 되지 못했고 세바스찬처럼 근사한 재즈바 사장님도 아니지만, 내일 아침 다시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실을 저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해주기로 했어요. 우리가 꿈꿨던 '라라랜드'는 어쩌면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오늘 하루를 묵묵히 버텨낸 우리 가슴 속 가장 따뜻한 구석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이제 다 마신 맥주 캔을 정리하고 침대에 누우려 합니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여전히 보랏빛으로 일렁이네요. 여러분도 오늘 밤, 잊고 지냈던 꿈의 파편 하나를 꺼내어 가만히 닦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 꿈이 여러분의 밤을 조금은 덜 외롭게 만들어줄 거예요.
혹시 여러분도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만약에'라는 상상에 밤잠을 설쳐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라라랜드의 마지막 미소처럼, 아픈 과거와 멋지게 화해한 경험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여러분의 그 반짝이는 이야기들이 궁금해지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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