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왕이 되고 싶었던 가짜 그리고 우리들의 서툰 진심에 대하여, 광해:왕이 된 남자

영화 광해:왕이 된 남자 포스터 이미지


진짜 왕이 되고 싶었던 가짜, 그리고 우리들의 서툰 진심에 대하여

비가 올 듯 말 듯 하늘이 잔뜩 찌푸린 주말 오후였습니다. 창문을 아주 살짝 열어두었는데,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갑더라고요. 지난주에 친구랑 사소한 일로 다퉜는데 아직 화해를 못 했거든요.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가 마음이 너무 찝찝해서 그냥 TV를 켰습니다. 주말 아침부터 밀린 빨래를 한 바탕 돌려놓고 건조대에 널고 나니 몸은 고단한데 정신은 이상하게 더 맑아지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넷플릭스 목록에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다시 발견했습니다. 사실 이 영화, 개봉했을 때 영화관에서 보고 나중에 명절 특선으로도 몇 번이나 봤던 건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 이병헌 씨의 서글픈 눈빛이 자꾸 눈에 밟히더라고요.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아마 저도 지금 누군가에게 '진짜 내 모습'이 아닌 '보여줘야 하는 모습'으로 연기하며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던 것 같아요. 직장에서는 유능한 대리여야 하고, 집에서는 든든한 자식이어야 하고... 가끔은 내가 누군지 헷갈릴 때가 있잖아요. 영화 속 하선이 왕의 대역을 하며 겪는 그 아슬아슬한 감정들이, 어쩌면 매일 아침 가면을 쓰고 현관문을 나서는 우리들의 일상과 참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캔맥주 하나 따서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다시 본 광해는, 예전엔 그냥 재밌는 사극이었는데 오늘은 유독 '사람 냄새'가 진동하는 에세이처럼 다가왔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걸까,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걸까

영화 속에서 광대 하선이 왕의 옷을 처음 입었을 때, 그 어색해하던 몸짓이 기억나세요? 밥 먹는 법, 걷는 법 하나하나를 배우며 벌벌 떨던 그 모습 말이에요. 그걸 보는데 제가 처음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구두 소리만 나도 가슴이 철렁하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네, 알겠습니다!"를 연발하며 상사의 눈치를 보던 제 모습이 딱 하선이 도승지 허균(류승룡) 앞에서 설설 기던 모습이었거든요. 사실 하선은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됐습니다. 진짜 왕 광해가 깨어날 때까지 사고 안 치고 자리만 지키면 끝나는 일이었죠.

그런데 하선의 가슴 속에 숨어있던 '오지랖'이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의 소식을 듣고, 어린 궁녀 사월이의 눈물 젖은 사연을 들으면서 하선은 연기를 멈추고 '진심'을 꺼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작년 여름 우리 집 천장이 샜던 기억이 났어요. 윗집이랑 보상 문제로 얼굴을 붉히고 있을 때, 평소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경비 아저씨께서 오셔서 "아이고, 속상하겠네"라며 제 손에 따뜻한 캔커피 하나 쥐여주시던 그 순간 말이에요. 그때 느꼈던 건, 그분이 경비원이라는 직함 때문이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서 저를 위로해주셨다는 거였거든요.

하선도 그랬던 것 같아요. 왕이라는 무거운 자리에 앉아있지만, 그는 정치적인 계산보다는 사월이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합니다. 대동법을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내 나라 내 백성이 밥 한 그릇 먹겠다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오!"라고 호통을 칠 때, 아... 저도 모르게 맥주 캔을 높이 들고 응원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이 부분은 제가 정치를 잘 몰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 투박한 진심이 세련된 정치 논리보다 훨씬 더 정의롭게 느껴졌습니다. 하선은 가짜 왕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조선에서 가장 진짜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완벽한 타이틀을 가진 사람보다, 내 아픔에 진심으로 고개 끄덕여주는 사소한 배려를 가진 사람에게 우리는 더 큰 마음을 여는 법이니까요.

팥죽 한 그릇의 온기, 그리고 우리가 잊고 산 눈맞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제 머릿속에는 하선이 사월이를 위해 남겨두었던 팥죽 한 그릇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사실 그 팥죽이 대단한 산해진미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누군가를 생각하며 남겨둔 그 마음의 온도가 모니터를 뚫고 제 거실까지 전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문득 아버지가 퇴근길에 가끔 사 오시던 노란 봉투의 붕어빵이 생각나더라고요. 겨울바람에 겉은 좀 눅눅해졌어도, 그 봉투를 품속에 넣고 달려오셨을 아버지의 온기 때문에 그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거든요. 하선이 보여준 통치(?)도 결국 그런 '붕어빵'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요?

여러분도 혹시 저처럼 그런 기분을 느낀 적 있으신가요? 나를 증명해야 하는 수많은 서류와 성과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누군가 건넨 "오늘 고생 많았어"라는 짧은 한마디에 모든 긴장이 풀려버리는 그런 순간 말이죠. 영화 속 조내관(장광)이나 도승지 허균이 결국 가짜 왕인 하선에게 마음을 다해 절을 올렸던 이유도 그가 진짜 왕족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보여준 인간적인 '눈맞춤' 때문이었을 겁니다. 저는 영화 마지막에 배를 타고 떠나는 하선을 향해 허균이 멀리서 고개를 숙이던 장면을 다시 돌려봤습니다. 아, 사실 이 장면은 제가 다시 봐도 잘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뭉클하네요. 허균 같은 냉철한 정치가가 무엇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가짜 왕을 지키려 했을까... 그건 아마 평생 찾아 헤맸던 '꿈꾸던 왕'의 모습을 천민 하선에게서 보았기 때문이겠죠.

우리는 늘 진짜가 되려고 발버둥 치지만, 어쩌면 세상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건 대단한 가문이나 스펙을 가진 '진짜'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가짜 하선' 같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밤에는 다퉜던 친구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보려 합니다. "야,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라고 말이죠. 거창한 사과나 논리적인 설명보다 그냥 이 투박한 한마디가 더 힘이 셀 것 같거든요. 영화 속 하선이 그랬던 것처럼요.

실록의 공백, 그 15일의 기록이 탄생시킨 상상력의 힘

문득 이 영화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궁금해서 예전에 기사를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실제 『조선왕조실록』의 한 대목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해요. 광해군일기 8년 2월 28일 자 기록을 보면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는 명과 함께, 실제로 광해군의 행적이 묘연하거나 기록이 비어있는 구간이 존재합니다. 역사학자들에게는 미스터리한 공백이었겠지만, 작가들에게는 이보다 더 매력적인 '빈칸'이 없었겠죠.

물론 역사적으로 광대 하선이 왕을 대신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는 100% 창작입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당시 광해군이 추진했던 대동법이나 명과 후금 사이의 실리 외교 같은 정책들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 아주 긴밀하게 엮여있다는 점이에요. 영화는 이 기록되지 않은 15일을 통해 우리가 바라는 '리더의 표상'을 하선이라는 인물에 투영했습니다.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를 더하자면, 이병헌 씨가 연기한 하선의 말투와 광해의 말투가 미묘하게 다른데, 이건 이병헌 씨가 직접 연구해서 제안한 설정이라고 하더라고요. 왕일 때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호흡을 짧게 끊지만, 하선일 때는 호흡이 훨씬 길고 어미 처리가 부드럽습니다. 이런 디테일이 모여서 우리가 '가짜 왕'의 매력에 푹 빠지게 만든 것이겠죠. 전문가들은 이 영화를 두고 "대중의 결핍을 정확히 파고든 사극 판타지"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팩트와 픽션의 그 절묘한 경계선이 주는 재미는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벌써 맥주 캔 바닥이 보이네요. 밖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고, 빗방울이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영화 속 하선은 궁을 떠나 다시 광대로 돌아갔지만, 그가 남긴 온기는 여전히 궁궐 구석구석에 남아있었겠죠. 저도 이제 소파에서 일어나 내일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비록 저는 내일 다시 평범한 직장인 '나'로 돌아가겠지만, 마음속엔 하선의 그 장난기 어린 웃음과 따뜻한 진심 하나를 품고 가보려 합니다.

여러분,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가끔은 연기가 서툴러도 괜찮습니다. 진짜 왕이 아니면 좀 어떻습니까. 내 곁의 사람들에게 팥죽 한 그릇의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이미 누군가에게 가장 소중한 '진짜'일 테니까요. 오늘 밤은 다들 따뜻한 이불 속에서 하선처럼 환하게 웃는 꿈을 꾸셨으면 좋겠습니다. 자, 저도 이제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야, 너 팥죽 좋아하냐?" 라고요. 답장이 오든 안 오든, 일단 제 마음은 이제 좀 편안해졌습니다. 다들 굿밤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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