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거대한 폭발보다 무서웠던 건 어느 과학자의 텅 빈 눈동자였습니다
오펜하이머, 거대한 폭발보다 무서웠던 건 어느 과학자의 텅 빈 눈동자였습니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제 마음은 좀 복잡했어요. 작년 여름이었나요, 한창 덥고 습해서 가만히 있어도 짜증이 확 올라오던 그런 날이었거든요. 퇴근길에 지하철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온통 '오펜하이머' 이야기뿐이더라고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물리니 양자역학이니 하는 단어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전형적인 문과생이거든요. "3시간 동안 과학자들 싸우는 걸 봐야 한다고?" 하는 생각에 선뜻 예매 버튼이 안 눌러지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밤, 집에서 혼자 편의점 네 캔 만 원짜리 맥주 중 하나를 따서 마시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가끔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을 저질러 놓고 밤잠을 설칠 때가 있는데, 세상을 끝장낼 수도 있는 무기를 만든 사람의 마음은 대체 어떤 지옥일까 하고요. 거창한 역사 공부를 하러 간 게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의 '속마음'이 궁금해서 주말 조조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팝콘 대신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들고 들어갔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올 때는 커피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있더라고요. 3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몰입했거든요. 아, 물론 중간에 루이스 스트로스 청문회 장면에서는 인물 관계가 조금 헷갈려서 "저 사람이 누구였더라?" 하고 머리를 긁적거리기도 했지만요.
내 안의 연쇄반응, 내가 뱉은 말이 칼이 되어 돌아올 때
영화를 보는 내내 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건 거대한 버섯구름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오펜하이머가 젊은 시절 교수님의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그 '독사과'였죠. 순간적인 질투와 치기 어린 마음으로 저지른 그 작은 행동이 나중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그의 모습이, 마치 예전의 제 모습 같아서 가슴이 철렁하더라고요. 여러분도 그런 적 없으신가요? 별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결국 나 자신을 갉아먹게 되는 그런 경험 말이에요.
저는 작년 이맘때쯤 직장 동료와 사소한 오해로 크게 다툰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했던 날카로운 말들이 나중에 밤마다 이불 속에서 떠올라 괴롭히더라고요. 영화 속에서 오펜하이머가 핵실험에 성공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환청을 듣고 발을 헛디디는 장면을 보는데, 그때 제 기분이 딱 그랬거든요. 분명 성공했는데, 다들 축하한다고 하는데, 정작 내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그 이질적인 감정요. 로스앨러모스의 그 황량한 벌판이 마치 제 좁은 자취방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고독함이 생생하게 전해졌습니다.
특히 킬리언 머피의 그 파란 눈동자가 클로즈업될 때마다 소름이 돋더라고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 덤덤한데, 눈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 구슬 같았어요. 과학자로서의 순수한 열망이 정치라는 괴물을 만나서 어떻게 변질되는지, 그리고 그 책임의 무게를 오롯이 혼자 짊어져야 하는 인간의 유약함이 제 삶의 고민들과 겹쳐 보였습니다. 내가 선택한 길인데,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을까? 이 질문이 영화 내내 저를 따라다녔던 것 같아요.
우리 모두는 각자의 트리니티 테스트를 치르며 삽니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 불이 켜졌을 때, 한동안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옆자리에 앉은 분은 지루했는지 기지개를 크게 켜시던데, 저는 이상하게 마음이 먹먹하더라고요.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승리와 몰락을 교차해서 보여주지만, 결국 우리에게 묻는 건 "당신이 만든 결과물을 당신은 감당할 수 있느냐"는 질문 같아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 공원을 한 바퀴 돌았어요. 아이들이 뛰어놀고 강아지들이 짖는 평화로운 풍경을 보는데, 아까 화면 가득 채웠던 그 강렬한 빛의 잔상이 계속 남더라고요. 우리는 매일매일 크고 작은 선택을 하잖아요.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결심하거나, 지긋지긋한 일을 그만두기로 하거나, 혹은 소중한 사람에게 진심을 전하거나 하는 일들이요. 그 선택들이 모여서 우리 인생의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때로는 우리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폭발을 일으키기도 하죠.
독자 여러분도 혹시 지금 감당하기 힘든 선택의 무게 때문에 잠 못 이루고 계신가요? 오펜하이머처럼 거창한 인류의 운명은 아닐지라도, 나만의 우주를 지탱하느라 애쓰고 있는 여러분께 이 영화를 꼭 추천하고 싶어요. 완벽한 영웅의 연대기가 아니라, 실수하고 후회하고 때로는 비겁해지기도 하는 한 인간의 지독한 일기장 같거든요. 영화를 보고 나면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하는 묘한 위로를 받으실지도 몰라요. 저도 그날 밤엔 맥주 대신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제가 저질렀던 실수들과 조금은 화해할 수 있었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꽃, 그리고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실제 이야기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책 제목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이 책을 영화화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계기가 재밌더라고요. 배우 로버트 패틴슨이 영화 '테넷' 촬영이 끝난 뒤 놀란 감독에게 오펜하이머의 연설문 모음집을 선물했는데, 그걸 읽고 영감을 받았다고 해요.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하죠? 선물 하나가 이런 대작을 만들었으니까요.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영화에서 묘사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8개 국어를 구사했고, 산스크리트어로 된 인도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원어로 읽을 정도였대요. 영화 속 명대사인 "나는 이제 죽음이요..."라는 구절도 거기서 나온 거고요. 하지만 영화가 가장 공들여 보여준 건 그의 천재성이 아니라, 그가 겪었던 '보안 청문회'의 치욕이었죠.
사실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오펜하이머가 겪은 고초는 역사적으로도 큰 비극이었어요. 소련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국가 기밀 접근 권한을 박탈당했는데, 이건 과학자로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거든요. 놀란 감독은 이 과정을 흑백 화면으로 연출해서 스트로스의 시점과 대비시켰는데, 이게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아요. 객관적인 사실(흑백)과 주관적인 고통(컬러)이 부딪히면서 관객들은 오펜하이머의 내면으로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가게 되니까요. 실제 역사를 알고 보면 그 청문회 장면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배가 된답니다.
영화관 문을 밀고 나오는데 시원한 바람이 훅 끼치더라고요. 3시간 동안 로스앨러모스의 뜨거운 열기 속에 갇혀 있다가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어요.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스마트폰, 길가에 세워진 자동차들... 이 모든 문명의 이기들이 누군가의 치열한 고민과 위험한 도박 끝에 탄생했다는 게 새삼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면서 저는 생각했어요. 오늘 저녁엔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한 통 걸어야겠다고요. 거창한 핵분열은 아닐지라도, 제 작은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온기가 되는 그런 연쇄반응을 시작해보고 싶어졌거든요. 영화 한 편 봤을 뿐인데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걸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오펜하이머가 던진 그 고민의 불꽃이 제 마음 한구석에 옮겨붙었나 봅니다. 여러분의 오늘 하루는 어떤 빛으로 빛나고 있나요?
혹시 이 영화를 보면서 저처럼 특정 장면에서 숨이 턱 막혔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영화 속 물리학 이론이 너무 어려워 중간에 깜빡 졸으셨을 수도 있고요(사실 저도 살짝 고비가 있었거든요). 여러분의 솔직한 감상이 궁금하네요. 질문이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 편하게 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