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싶은 것들, 타지마할의 일몰과 내 방의 눅눅한 공기 사이

영화 버킷리스트 포스터 이미지

오늘 제 기분은 꼭 다 태우고 남은 연탄재 같아요. 겉은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데 속은 텅 비어서, 누군가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더라고요. 사실 어제 퇴근길에 집 앞 편의점에 들러서 수입 맥주 네 캔을 샀거든요. 평소엔 안 마시던 흑맥주를 골랐는데, 그 쌉싸름한 맛이 왠지 제 일상이랑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나 봐요. 씻지도 않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맥주 캔을 따는데, 문득 거실 벽에 걸린 달력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어느새 올해도 절반이 지났는데, 정작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은 하나도 못 한 채 시간만 흘려보낸 것 같아 갑자기 울컥했습니다.

이 영화를 왜 보게 됐냐면요, 사실 아주 사소한 계기였어요. 며칠 전 친구랑 카톡으로 싸웠거든요. 별것도 아닌 일로 자존심 세우다가 화해 타이밍을 놓쳤는데, 그 찝찝한 마음이 계속 가슴 한구석을 쿡쿡 찌르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우리는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하는 조금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이 영화, '버킷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2007년에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봤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는 그냥 '할아버지들이 여행 가는 영화네' 하고 가볍게 넘겼었거든요. 그런데 서른을 넘기고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 다시 보니, 화면 속 잭 니콜슨의 주름 하나하나가 다르게 읽히더라고요.

비가 와서 창문 여는 소리가 들리는 방 안에서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며 영화를 시작했습니다. 잭 니콜슨이 연기한 에드워드는 돈은 넘쳐나지만 성격은 괴팍한 억만장자고, 모건 프리먼이 연기한 카터는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한 자동차 정비사죠. 전혀 섞일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말기 암 판정을 받고 한 병실에서 만나는 설정부터가 참 얄궂더라고요. 아, 이 부분은 제가 다시 봐도 참 먹먹해요.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평등 앞에서 돈이 많든 적든 환자복 하나 걸치고 퀭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그 모습 말이에요. 사실 영화 초반부는 줄거리가 잘 기억 안 날 정도로 두 배우의 표정 연기에 취해 있었습니다. 잭 니콜슨의 그 능청스러운 미소와 모건 프리먼의 깊은 눈빛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훌쩍 가버리더라고요.

타지마할의 일몰과 내 방의 눅눅한 공기 사이

영화 속에서 두 노인이 병원을 뛰쳐나와 전 세계를 누비는 장면들을 보는데, 갑자기 어릴 적 아버지가 사 오신 붕어빵 봉투의 온기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는 늘 바쁘셨고, 우리 가족은 변변한 해외여행 한 번 가본 적이 없었거든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당신의 버킷리스트가 무엇인지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아마 당신의 리스트 1번은 늘 '자식들 뒷바라지'였겠죠. 영화 속 카터도 마찬가지예요.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가족을 위해 45년간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살았죠. 카터가 병원 메모지에 적어 내려가던 리스트들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휴대폰 메모장을 켰습니다.

[사람들이 버킷리스트를 왜 쓰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단순히 '나 이거 해봤어'라고 자랑하기 위한 목록이 아니더라고요. 그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는 사람으로 존재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처절한 몸부림 같은 거예요. 리스트를 작성하면 좋은 점이 참 많더라고요. 우선, 내가 정말로 무엇을 할 때 행복한 사람인지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돼요. 우리는 남의 눈치를 보느라, 혹은 먹고살기 바빠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잊고 살 때가 많잖아요. 그런데 '죽음'이라는 마감 기한을 정해놓고 리스트를 쓰다 보면, 진짜 소중한 것들이 걸러져 나오더라고요. 명품 가방을 사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노을을 보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것처럼요.

에드워드와 카터가 만리장성을 오토바이로 질주하고, 피라미드 위에서 인생을 논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어요. 작년 여름 우리 집 천장이 샜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물바다가 된 거실을 치우며 남편이랑 투덜거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엉망진창이었던 순간도 우리가 함께 살아있다는 증거였더라고요. 에드워드가 비싼 커피(코피 루왁)의 비밀을 알고 박장대소하는 장면을 보면서, 저도 맥주를 마시다 뿜을 뻔했어요. 아, 이 부분은 정말... 인생의 비극과 희극은 정말 한 끗 차이라는 걸 보여주는 명장면인 것 같아요. 여러분도 혹시 저처럼 사소한 것에 목숨 걸고 싸우다가 정작 중요한 행복을 놓치고 계신 건 아닌가요?

인생의 행복을 찾았는가? 그리고 당신의 삶이 다른 이를 기쁘게 했는가?

영화가 끝나갈 무렵, 카터가 에드워드에게 던진 두 가지 질문은 제 뒤통수를 강하게 때리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인생에서 행복을 찾았는가?" 그리고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했는가?" 이 질문을 듣는 순간, 지난주에 친구와 다투고 화해하지 못한 채 꽁해 있던 제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사실 그 친구는 제가 힘들 때 항상 곁에 있어 줬던 소중한 존재였거든요. 죽음이 코앞에 닥친다면 그깟 자존심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카터가 세상을 떠나고 에드워드가 단절됐던 딸을 찾아가 손녀의 볼에 입을 맞추는 장면은, 제가 이번 주에 본 그 어떤 액션 영화보다 더 강렬한 감동을 줬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저처럼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나중에 여유 생기면'이라며 소중한 일들을 미루고 계신 건 아닌가요? 버킷리스트를 쓴다는 건, 그 '나중'이라는 신기루를 잡으러 가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가장 뜨겁게 살겠다는 약속이더라고요. 목록에 대단한 걸 적을 필요도 없어요.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하기', '혼자 제주도 바다 보러 가기', '싸웠던 친구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하기'... 이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우리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는 거죠.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나갈 때마다 느껴지는 그 묘한 성취감은, 우리를 우울함의 늪에서 건져 올리는 구슬땀 같은 역할을 해줍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캔맥주 네 캔이 다 비었더라고요. 취기가 약간 올라오는데, 창밖의 빗소리가 아까와는 다르게 참 다정하게 들렸습니다. 에드워드와 카터의 유해가 든 깡통이 히말라야 꼭대기에 나란히 놓이는 마지막 장면을 보며, 저도 제 인생의 리스트 1번에 적어 넣었습니다. '내일 아침 눈 뜨자마자 친구에게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기'라고요. 여러분, 죽음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의 등 뒤에 항상 붙어 다니는 그림자 같아요. 그 그림자가 우리를 덮치기 전에, 우리는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리스트에는 지금 무엇이 적혀 있나요?

잭 니콜슨의 은퇴작과 '버킷리스트'라는 단어의 탄생 비화

이 영화에 대해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드릴까요? 사실 '버킷리스트(Bucket List)'라는 단어는 이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대중적으로 거의 쓰이지 않던 말이었대요. 중세 시대에 죄수를 처형할 때 양동이(Bucket) 위에 세워놓고 양동이를 걷어찼던(Kick the bucket) 것에서 유래한 '죽다'라는 속어를, 각본가 저스틴 잭햄이 근사한 제목으로 바꾼 거죠. 영화 한 편이 전 세계인의 언어 습관을 바꿔놓은 셈이에요. 대단하지 않나요?

또한, 이 영화는 전설적인 배우 잭 니콜슨의 사실상 마지막 주연작이나 다름없어요. 그는 이 영화 이후로 작품 활동이 뜸해지다가 결국 은퇴를 선언했죠. 그래서인지 에드워드가 죽음을 준비하는 연기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실제로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정말 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영화 속 두 사람의 케미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던 거죠. 3,600만 달러 정도의 제작비로 1억 7천만 달러가 넘는 흥행을 기록한 건, 단순히 두 노인의 여행이 즐거워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후회 없는 삶'에 대한 갈망을 건드렸기 때문일 겁니다.

세탁기가 다 돌아갔다는 알림음이 들리네요. 눅눅한 빨래를 하나씩 널면서, 내일은 조금 더 정성스럽게 하루를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요약하자면... 아, 이런 말은 너무 딱딱하죠? 그냥 일기장을 덮듯이, 혹은 극장 문을 열고 나가는 사람의 혼잣말처럼 마무리하고 싶네요.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다. 내일은 꼭 그 붕어빵 집이 열었으면 좋겠네."

혹시 여러분도 지금 자기만의 리스트를 적어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너무 거창하지 않아도 좋아요. 지금 당장 생각나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적어보세요. 그게 여러분의 내일을 바꾸는 기적이 될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