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북, 치킨 한 조각의 용기, 내가 먼저 손을 내민다는 것

영화 그린북 포스터 이미지


오늘 아침엔 유난히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싫더라고요. 어제 늦게까지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몸이 천근만근이었거든요. 꾸역꾸역 일어나서 세탁기를 돌려놓고, 거실 바닥에 굴러다니던 귤 몇 개를 까먹으면서 TV를 켰습니다. 딱히 뭘 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마침 영화 채널에서 <그린 북>을 해주는 거예요. 사실 이 영화, 예전에 극장에서 봤을 때 참 따뜻했던 기억이 있어서 채널을 멈췄죠. 귤껍질 까는 냄새가 거실에 가득 퍼지는데, 화면 속 토니가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장면이 나오니까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아, 저 맛있는 걸 왜 안 먹으려 했을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마음속에도 토니나 돈 셜리 같은 '고집불통' 면모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금 말랑해졌습니다.

"치킨 한 조각의 용기, 내가 먼저 손을 내민다는 것"

영화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차 안에서 두 남자가 치킨을 나눠 먹는 장면이에요. 사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예전에 회사 동료와 크게 다퉜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사소한 업무 스타일 차이였는데, 서로 "내가 맞고 네가 틀렸다"며 한 달 넘게 말도 안 섞었거든요. 그러다 어느 비 오는 날 오후에 그 동료가 슬그머니 제 책상에 편의점 커피 한 캔을 올려두더라고요. "이거 마시고 잠 좀 깨요"라는 무심한 한마디에 그동안 쌓였던 앙금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토니가 셜리에게 치킨 한 조각을 건네던 그 촌스럽고도 투박한 손길이 딱 그랬던 것 같아요.

돈 셜리는 정말 고고한 사람입니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까지 있는 천재 피아니스트인데, 흑인이라는 이유로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못 가는 비참한 현실을 견뎌야 하죠. 반면 토니는 주먹이 먼저 나가는 이탈리아계 이민자고요. 이 두 사람이 좁은 자동차 안에서 티격태격하며 남부로 향하는 모습은, 마치 우리 삶에서 절대로 섞일 것 같지 않은 사람과 한 팀이 되어 일하는 고단한 일상과 참 닮았습니다. 저도 예전엔 저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은 아예 인생에서 지워버리곤 했거든요. 그런데 나이를 먹다 보니, 셜리처럼 외로운 섬으로 남는 것보다는 토니처럼 조금은 무식하고 시끄러워도 옆에서 닭다리 하나 건네주는 사람이 더 귀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당신의 인생에도 '그린 북'이 필요한 순간이 있나요?

영화가 끝나갈 무렵,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밤에 토니의 집으로 셜리가 찾아오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남부 투어'가 있는 것 같아요. 내 편 하나 없는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하거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버텨야 하는 그런 시간 말이죠. 여러분은 그럴 때 누구에게 의지하시나요? 혹시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나랑은 급이 달라' 혹은 '너무 무식해'라며 밀어내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사실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제가 예전에 셜리 박사처럼 너무 꼿꼿하게만 굴었던 건 아닐까 반성하게 됐습니다. 내 자존심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토니처럼 허허실실 웃으며 "이거 한 번 먹어봐, 진짜 맛있어"라고 말할 줄 아는 여유가 진짜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영화 속 셜리가 "품위가 이긴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 품위를 완성한 건 토니의 진심 어린 우정이었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세탁기 다 돌아갔다고 알람이 울리네요. 현실은 이렇게 로맨틱하지만은 않지만, 오늘 저녁엔 저도 용기 내서 오랫동안 연락 못 했던 친구에게 톡 하나 보내보려 합니다. "잘 지내냐?"라는 아주 짧은 안부라도 말이죠.

실화의 힘, 그리고 1960년대 미국을 달렸던 가이드북의 진실

이 영화가 주는 묵직한 감동은 이게 '진짜 있었던 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겁니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그린 북'은 실제로 1936년부터 1966년까지 매년 발행되었던 흑인들을 위한 여행 가이드북이에요. 정식 명칭은 '흑인 운전자를 위한 그린 북(The Negro Motorist Green Book)'이었죠. 빅터 휴고 그린이라는 우체부 출신 남자가 만든 건데, 당시 흑인들이 여행할 때 거부당하지 않고 밥을 먹거나 잠을 잘 수 있는 장소들을 빼곡히 적어둔 생존 지침서나 다름없었습니다.

실존 인물인 돈 셜리는 실제로 세 개의 박사 학위를 가졌고 8개 국어를 구사하는 천재였다고 해요. 하지만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실제 그의 가족들은 "돈 셜리가 흑인 사회와 그렇게 단절된 사람은 아니었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작진은 토니 발레롱가의 아들인 닉 발레롱가가 직접 각본에 참여하며, 그들이 나누었던 '개인적인 우정'에 더 집중했다고 하네요. 사실 역사적 팩트 체크도 중요하지만, 저는 두 남자가 나눴던 그 따뜻한 편지 대화들이나 서로를 지켜주려 했던 마음만큼은 진짜였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게 영화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니까요.

세탁기에서 옷을 꺼내 널고 나니 집안에 비누 냄새가 은은하게 퍼집니다. <그린 북>을 보고 난 후의 기분이 딱 이런 냄새 같아요. 화려하진 않지만 깨끗하고 다정한 느낌 말이죠. 지금 밖은 여전히 춥고 세상은 각박해 보여도, 우리 모두 마음속에 토니 같은 친구 한 명, 혹은 누군가에게 치킨을 건넬 수 있는 따뜻한 손길 하나쯤은 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녁은 저도 프라이드치킨이나 한 마리 시켜 먹어야겠어요. 물론 셜리 박사처럼 우아하게 포크를 쓰는 대신, 토니처럼 손가락 쪽쪽 빨아가면서 말이죠. 여러분도 오늘 하루, 누군가에게 작은 '초록색 북극성'이 되어주는 그런 따뜻한 시간 보내시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