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나이트, 영웅으로 죽거나,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된 자신을 마주하거나

영화 다크나이트 포스터 이미지


영웅으로 죽거나,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된 자신을 마주하거나

이 영화를 왜 보게 됐냐면요, 사실 아주 유치한 이유 때문이었어요. 몇 년 전이었나, 회사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업무 실수를 저질러서 온종일 상사에게 깨지고 돌아온 날이 있었거든요. 밤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는데, 집에 오는 길에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더라고요. 우산도 없어서 대충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뛰어 들어왔는데, 현관문 앞에 서서 젖은 신발을 보니까 갑자기 울컥하는 거예요. "나 진짜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데, 왜 세상은 나한테만 이럴까?" 하는 억울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죠. 그때 무심코 TV를 켰는데 마침 영화 채널에서 '다크 나이트'가 막 시작하고 있더라고요. 예전에 극장에서 보긴 했지만, 그날은 유독 배트맨의 그 시커먼 망토가 제 축 처진 어깨처럼 보여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끝까지 보게 됐습니다.

씻지도 않고 젖은 옷 그대로 앉아서 영화를 보는데,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캔맥주 한 모금이 그렇게 달더라고요. 보통 히어로 영화라고 하면 악당을 때려잡고 "정의는 승리한다!" 하며 끝나는 게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이 영화는 볼수록 제 마음을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어요. 마치 조커가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서 저한테 "너도 사실은 나랑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아?"라고 비웃는 느낌이랄까요. 그날 밤 저는 조커의 광기보다, 그 광기에 무너져가는 고담시의 평범한 시민들이 더 무서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바로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 같기도 했거든요.

고담시의 혼돈과 내 방 안의 작은 폭풍우

영화 속에서 조커가 배트맨에게 정체를 밝히라고 협박하며 시민들을 죽여나갈 때, 고담 시민들이 배트맨을 원망하기 시작하잖아요. 그 장면을 보는데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더라고요. 저희 집 위층에서 물이 새서 거실 천장에 커다란 얼룩이 생겼던 적이 있어요. 처음엔 그냥 수리비만 받으면 되겠지 싶었는데, 윗집 주인분이 "우리 잘못이 아니다"라며 발뺌을 하시는 거예요. 분명히 그쪽 잘못인데도 말이죠. 평소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던 제가, 그날은 정말 입에 담지 못할 험한 말을 내뱉으며 싸웠거든요.

영화 속 하비 덴트가 "동전 던지기"로 사람의 목숨을 결정하는 괴물로 변해버린 것처럼, 저도 그 순간만큼은 제 안에 숨겨져 있던 아주 고약한 본성을 마주한 기분이었어요. "상황이 변하면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게 될 거야"라던 조커의 말이 제 좁은 거실 안에서도 증명되고 있었던 셈이죠. 다크 나이트를 보면서 소름이 돋았던 건 화려한 액션 때문이 아니었어요. 아주 사소한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우리네 도덕심을 조커가 너무나 적나라하게 헤집어 놓았기 때문이더라고요. 사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때 제가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 저도 모르게 누군가를 비난할 대상을 찾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망설임 섞인 후회가 남기도 하네요.

여러분도 가끔은 나쁜 사람으로 오해받고 싶을 때가 있나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 배트맨이 하비 덴트의 죄를 뒤집어쓰고 경찰들에게 쫓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제임스 고든 형사가 자기 아들에게 말하죠. "그는 영웅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감시자야. 침묵의 수호자이자, 어둠의 기사지." 이 대사를 듣는데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더라고요. 여러분도 혹시 그런 적 없으신가요? 분명히 내가 잘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오해를 사거나 비난을 감수했던 경험 말이에요.

저는 예전에 친한 친구가 실수를 했을 때, 그 친구의 자존심을 지켜주려고 제가 한 일인 것처럼 주변에 말했던 적이 있어요. 덕분에 친구는 위기를 넘겼지만, 한동안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 못 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죠. 그때의 찝찝함과 억울함이 배트맨의 뒷모습에 투영되더라고요. 아, 물론 제가 배트맨처럼 대단한 희생을 한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세상에는 가끔 진실보다 '희망'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그 씁쓸한 교훈이, 제 삶의 작은 조각들과 맞물려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Why so serious?"라고 묻는 조커에게 "인생은 원래 이렇게 진지하고 아픈 거야"라고 대신 대답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달까요.

히스 레저가 남긴 마지막 조각, 그리고 조커의 탄생

이 영화가 개봉한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단연 히스 레저의 조커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실제로 히스 레저는 이 역할을 준비하면서 호텔 방에 자신을 가두고 한 달 넘게 '조커의 일기'를 썼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단순히 미친 사람을 연기한 게 아니라,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무질서' 그 자체를 연기하고 싶어 했다고 해요. 영화 속에서 간호사 복장을 하고 병원을 폭파하는 장면에서 폭탄이 제때 안 터지자 무심하게 리모컨을 흔드는 장면, 그거 사실 대본에 없던 애드리브였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그만큼 그는 조커라는 인물에 완벽하게 동화되어 있었던 거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영화를 찍을 때 CG(컴퓨터 그래픽)를 최대한 배제하기로 유명했는데, 실제로 조커가 트럭을 뒤집는 장면도 진짜 트럭을 개조해서 실제로 뒤집어버렸다고 해요. 이런 사실적인 연출이 히스 레저의 광기 서린 연기와 만나면서, 우리에게 이 영화가 단순한 만화 원작 영화가 아닌 지독하게 현실적인 범죄 스릴러로 다가오게 된 것이죠. 이 영화가 미국 의회도서관에 영구 보존된 이유도, 단순한 흥행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불안을 가장 영화적인 언어로 잘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가 다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한동안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어요. 캔맥주는 이미 미지근해졌고, 빗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리더라고요. 배트맨은 왜 그렇게까지 힘들게 살아야 했을까요? 그냥 하비 덴트의 추락을 세상에 알리고 자신은 영웅 대접을 받으며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는 가끔 믿고 의지할 '하얀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저도 내일이면 다시 출근을 하고, 싫은 소리를 들어도 웃으며 넘겨야 하는 일상을 살아가겠죠.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를 것 같아요. 내 안의 조커가 고개를 들려고 할 때마다, 어둠 속을 묵묵히 달려가던 배트맨의 그 쓸쓸한 오토바이 소리를 떠올릴 것 같거든요. 완벽한 정의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가 지켜야 할 선이 무엇인지는 다시 한번 고민해보게 된 밤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지금 어떤 기사가 살고 있나요? 혹시 오늘 하루,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악당이 되기로 결심한 적은 없으셨는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영화 한 편이 인생을 바꾸진 못해도, 적어도 내일 아침 거울을 보는 제 표정 하나는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 이제 내일의 '전쟁터'로 나가기 위해 잠을 청해야겠네요. 빗소리가 참 좋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인생 영화로 꼽는 작품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배트맨보다 조커에게 더 마음이 갔던 독특한 경험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다음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들고 올지 저도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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