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진 소리에 묻어버린 한 남자의 진심, 포드 대 페라리

영화 포드 대 페라리 컷 이미지


오늘 제 기분은 꼭 비 오기 직전의 눅눅한 아스팔트 같았어요. 사실 며칠 전부터 회사 프로젝트 때문에 상사한테 사정없이 깨졌거든요. 기획안을 가져가면 "이게 우리 회사 이미지랑 맞니?", "숫자가 안 보이잖아" 같은 소리만 되풀이하는데, 정작 제가 담고 싶었던 핵심은 아무도 봐주지 않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어제는 퇴근길에 동네 편의점에서 4캔에 만 원 하는 맥주를 사 들고 터벅터벅 들어왔습니다. 빨래 건조대에 걸린 반팔 티셔츠들이 덜 말라 꿉꿉한 냄새를 풍기는 방 안에서, 무심코 넷플릭스를 켰다가 이 영화 <포드 V 페라리>와 다시 마주쳤습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땐 자동차들이 트랙을 미친 듯이 질주하는 액션에만 집중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어요. 캔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는데, 영화 속 켄 마일스가 기름때 묻은 손으로 렌치를 휘두르는 모습이 왜 그렇게 제 모습처럼 보였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이라는 게 결국 내가 가진 기술이나 열정을 거대 자본이라는 시스템에 끼워 맞추는 과정이잖아요.

영화를 보는 내내 방 안은 조용했지만 제 가슴 속에는 엔진 소리가 가득 찼습니다. 맷 데이먼과 크리스찬 베일, 두 배우의 연기가 좋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들의 눈빛 너머에 있는 '외로움'이 보이더라고요. 세상은 결과로만 사람을 평가하지만, 정작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 밤을 새우고 브레이크가 녹아내릴 정도로 달린 사람의 마음은 누가 알아줄까 싶어서요. 사실 영화 중간쯤 보다가 안주로 뜯어놓은 오징어가 너무 딱딱해서 턱이 아픈데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영화가 왜 저를 이렇게 흔들어 놓았는지, 조금 더 깊게 수다를 떨어보고 싶어지더라고요.

1. 기름때 묻은 작업복과 넥타이 사이, 그 어딘가의 우리들

영화 속에서 켄 마일스는 정말 '못된' 사람처럼 보여요. 타협할 줄 모르고, 입은 거칠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포드 같은 거대 기업 부회장 면전에서 쓴소리를 내뱉죠. 그런데 말이죠, 저는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도 회의실에서 제가 낸 아이디어가 난도질당할 때 "네, 알겠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라며 비굴하게 웃었거든요. 켄 마일스는 적어도 자기가 만든 차가, 자기가 밟는 엑셀이 어떤 진실을 말하는지 아는 사람이잖아요.

제 어릴 적 기억 중에 하나가 아버지가 낡은 무쏘 자동차 본닛을 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엔진오일을 직접 갈던 모습이에요. 어린 마음엔 "그냥 정비소에 맡기지 왜 저러실까"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그 낡은 기계와 대화를 나누고 계셨던 것 같아요. 켄 마일스가 차의 상태를 소리만 듣고도 알아차리는 것처럼요. 영화 속 포드 임원들이 넥타이를 매고 "레이싱은 마케팅이다"라고 떠들 때, 켄과 셸비는 트랙 위에서 생명을 걸고 7000RPM의 한계에 도전합니다.

이 장면들을 보는데 작년 여름, 우리 집 천장에서 물이 새서 고생했던 기억이 스쳤어요. 수리하러 오신 기사님이 뙤약볕 아래서 꼬박 3시간을 고생하시더니, "이제 절대 안 샐 겁니다"라며 씨긋 웃으시더라고요. 그건 돈 때문이 아니라 자기 기술에 대한 자존심 같은 거였죠. 켄 마일스가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속도를 줄이라는 회사의 명령을 받았을 때 느꼈을 그 참담함, 하지만 결국 동료를 위해 브레이크를 밟았을 때의 그 복잡한 표정. 아, 이 부분은 제가 다시 봐도 가슴이 먹먹해서 맥주 한 캔을 더 따게 만들더라고요. 시스템 안에서 개인의 빛이 꺼져가는 걸 보는 건 언제나 괴로운 일이니까요.

2. 마지막 0.5초의 침묵, 당신은 인생의 결승선에서 누구를 보나요?

영화의 백미는 역시 마지막 르망 24시 경기 장면입니다. 24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차를 몰아본 적은 없지만, 우리 인생도 결국 장거리 레이스잖아요. 남들보다 앞서가려고 아등바등하다가도, 어느 순간 "내가 지금 누굴 위해 이렇게 달리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켄 마일스는 우승컵을 눈앞에 두고도 포드 홍보를 위해 속도를 늦춰줍니다. 결과적으로 공식 우승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죠.

저는 그 장면에서 켄 마일스의 표정이 잊히지 않아요. 억울함보다는 오히려 해탈한 것 같은, 아니면 이미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에 상장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한 그 미소요. 여러분은 혹시 살면서 누군가를 위해, 혹은 조직을 위해 자신의 공을 양보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예전에 팀 프로젝트 공로를 뺏겼을 때 며칠 밤을 억울해서 잠을 못 잤거든요. 그런데 켄을 보니까 제가 참 작아 보이더라고요. 진짜 고수는 자기가 완벽했다는 걸 스스로 알면 그걸로 충분한 건데 말이죠.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거실에 불도 안 켜고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켄 마일스의 허망한 마지막을 보면서 "인생 참 덧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셸비 같은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있다면 꽤 괜찮은 인생이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싸우고 몽키 스패너를 던지며 개싸움을 벌여도, 결국 서로의 진심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 "이 차가 정말 완벽하다고 생각하나?"라고 물어봐 주는 동료가 있다면, 그게 바로 우리 인생의 진정한 승리가 아닐까 합니다. 여러분의 곁에는 누가 있나요? 혹시 지금 너무 빠르게만 달리고 있어서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묻고 싶어지네요.

3. 실화가 주는 묵직한 힘: 7000RPM 뒤에 숨겨진 이야기

이 영화가 단순한 픽션이었다면 이만큼의 감동은 없었을 거예요. 사실 이 이야기는 1966년 르망 24시에서 일어난 전설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죠. 당시 포드는 정말로 페라리를 꺾고 싶어 미쳐 있었습니다. 엔초 페라리가 헨리 포드 2세를 향해 "뚱뚱하고 멍청한 공장장"이라고 욕했다는 건 레이싱 팬들 사이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일화죠. 그 모욕 한마디가 자동차 역사를 바꾼 GT40를 탄생시킨 동력이 된 셈입니다.

재밌는 건 영화 속 켄 마일스와 캐롤 셸비의 우정이 실제로는 영화보다 더 거칠고 드라마틱했다는 점이에요. 영화에 등장하는 GT40 Mark II는 당시 기술력으로는 거의 괴물에 가까운 머신이었습니다. 브레이크 과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행 도중 캘리퍼 전체를 갈아치우는 기상천외한 전략을 쓴 것도 실화고요. 실제 켄 마일스는 영화에서 묘사된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엔지니어링 감각을 지녔었다고 해요.

하지만 영화가 팩트보다 더 훌륭하게 짚어낸 지점은 바로 '기업 논리'에 희생된 한 장인의 명예입니다. 당시 포드의 '트리플 피니시(세 대가 동시에 들어오는 것)' 연출은 마케팅적으로는 신의 한 수였을지 몰라도, 레이서 켄 마일스에게는 잔인한 처사였죠. 실제 역사 속에서도 그는 그해 르망 우승자가 되지 못했고, 몇 달 뒤 테스트 주행 중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레이싱 영화를 넘어 '전기 영화'로서 가치를 갖는 이유는, 역사 속에 묻힐 뻔한 켄 마일스의 그 '0.5초의 희생'을 스크린으로 완벽하게 부활시켰기 때문입니다.

밤이 깊어지니 빗소리가 제법 커졌네요. 내일 아침에도 저는 다시 넥타이를 조여 매고 전쟁터 같은 사무실로 나가야겠죠.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켄 마일스가 남긴 엔진 소리 하나를 품고 가거든요. 남들이 보기엔 그저 평범한 직장인의 하루겠지만, 제 개인의 레이스에서는 저만의 7000RPM을 밟아보려고요.

여러분도 오늘 하루, 세상의 기준에 맞추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혹시 지금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속상하시다면, 그건 단지 공식 기록지의 숫자일 뿐이라는 걸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얼마나 뜨겁게 달렸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는 본인만이 아는 가장 고귀한 승리니까요.

자, 이제 빨래를 걷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네요. 다 마른 줄 알았는데 소매 끝이 아직 조금 눅눅한 걸 보니, 제 인생의 레이스도 아직은 건조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가 봅니다. 여러분도 오늘 밤만큼은 엔진 소리 없는 평온한 휴식이 되길 바랄게요. 혹시 다음 주말에 시간이 나신다면, 이 영화를 꼭 한번 다시 보세요. 그때는 엔진 소리보다 두 남자의 손바닥에 새겨진 굳은살이 먼저 보일 겁니다. 그럼, 내일도 무사히 완주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