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돈, 평범한 숫자가 괴물이 되어가는 시간, 지하철 환풍구 사이로 흩어진 꿈들, 내 계좌의 숫자가 내 인격이 될 때 우리가 잃어버린 ‘진짜’의 가치
평범한 숫자가 괴물이 되어가는 시간, 지하철 환풍구 사이로 흩어진 꿈들
오늘 제 기분은 마치 1,000피스짜리 퍼즐을 다 맞춰놓고 마지막 한 조각을 잃어버린 듯한 묘한 허탈함 속에 있습니다. 분명 그림은 완성된 것 같은데, 가슴 한복판이 뻥 뚫려버린 느낌 말이에요. 사실 어제 오후에 연차를 내고 여의도를 한참 걸었거든요. 퇴근 시간도 아닌데 정장 차림으로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무거운 가죽 가방 안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욕망과 불안이 담겨 있을까 궁금해지더라고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숨차게 달리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가을 초입의 서늘한 바람을 타고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정말 우연한 계기였어요. 얼마 전 대학교 동창 녀석을 만났는데, 이 친구가 자기는 이제 ‘파이어족’이 되겠다며 스마트폰 화면 속 빨간색과 파란색 숫자들이 어지럽게 널린 주식 창을 보여주더라고요. "야, 이제 노동의 가치는 끝났어. 돈이 돈을 버는 시대야"라고 호기롭게 말하는 친구의 눈빛에서 저는 왠지 모를 서늘함을 느꼈습니다.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을 켜니 뉴스마다 ‘영끌’, ‘빚투’ 같은 단어들이 쏟아지더군요. 그때 문득, 2019년에 개봉했을 당시 "제목 참 직설적이네"라며 지나쳤던 영화 <돈>이 떠올랐습니다.
집에 도착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이 영화를 틀었습니다. 사실 저는 예전부터 류준열이라는 배우의 얼굴을 좋아했거든요. 전형적인 미남은 아닐지 몰라도, 우리 주변 어딘가에 있을 법한 평범한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평범한 얼굴이 돈의 맛을 보며 점점 서늘하게 변해가는 과정이 어찌나 소름 돋던지, 영화를 보는 내내 제 손바닥에도 땀이 배어 나오더라고요. 중간에 아내가 들어와 "아직도 안 자고 뭐 해?"라고 물었지만, 대답도 못 할 정도로 화면 속 조일현의 눈빛에 압도당해 있었습니다.
내 계좌의 숫자가 내 인격이 될 때, 우리가 잃어버린 ‘진짜’의 가치
영화 속 조일현은 부자가 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여의도 증권가에 입성한 신입 브로커입니다. 백도 없고 줄도 없는 그가 느끼는 소외감과 압박감은,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과 다르지 않죠. 저 역시 사회 초년생 시절, 회사 화장실 칸에 숨어 남몰래 한숨을 내쉬던 기억이 나더라고요. "열심히 배우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조일현에게 "여기가 학교냐!"라고 윽박지르는 상사의 모습은, 작년 여름 제가 프로젝트 마감에 쫓기며 후배에게 무심코 던졌던 날카로운 말들과 겹쳐져 가슴 한구석을 찌릿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이번에 다시 보며 제 가슴을 가장 아프게 찌른 건, 조일현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변해가는 소소한 디테일들이었어요. 원래 쓰던 낡은 지갑 대신 명품 지갑을 사고, 오래된 연인과의 소박한 데이트보다 화려한 파티를 즐기게 되는 과정 말이에요. 사실 저도 예전에 인센티브를 조금 크게 받았을 때, 평소엔 사지도 않던 비싼 구두를 사고는 세상이 내 발밑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던 적이 있거든요. 그 구두가 결국 제 발을 헐게 만들 줄도 모르고 말이죠. 조일현이 ‘번호표’라는 정체불명의 설계자를 만나 위험한 거래를 시작하는 순간, 그건 단순히 주식 작전의 시작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조금씩 떼어 파는 계약처럼 보였습니다.
아, 이 부분은 제가 다시 봐도 참 먹먹하네요. 조일현이 돈 맛을 보면서 부모님께 고가의 선물을 드리지만, 정작 부모님과 마주 앉아 밥 한 끼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는 장면 말이에요. "다 돈 벌려고 하는 짓인데, 왜 정작 소중한 사람들과는 멀어져야 할까?"라는 모순적인 상황이 너무나도 현실적이라 씁쓸했습니다. 금융감독원의 ‘사냥개’ 한지철이 조일현을 옥죄어올 때, 그 불안함에 몸서리치면서도 끝내 ‘번호표’의 손을 놓지 못하는 그 괴물 같은 집착... 여러분도 혹시 무언가에 홀린 듯 소중한 것을 잃어가면서도 멈추지 못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지하철 창밖으로 스쳐 가는 욕망의 잔상
영화가 막바지로 향하며 조일현이 탄 지하철이 밤의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어둠 속을 가르는 열차의 소음이 마치 우리 심장 박동 소리처럼 들리더라고요. 류준열의 얼굴 위로 도심의 불빛들이 번갈아 지나갈 때, 그 얼굴은 승리자의 표정도, 그렇다고 패배자의 표정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돈’이라는 거대한 괴물에게 물어뜯긴 채 만신창이가 된 한 인간의 공허함만 남아 있었죠. 그 장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제 가방 속 지갑을 만져봤습니다. 이 지갑 안의 숫자들이 정말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게 맞는지 자문하면서요.
영화 속 ‘번호표’ 유지태가 "왜 이런 일을 계속하느냐"는 질문에 "재밌으니까"라고 답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우리에게 돈은 생존의 수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파괴하고 조종하는 게임의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잔인하게 다가왔거든요. 사실 요즘 주식 시장이나 코인 시장을 보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비일비재하잖아요. 태풍이 오면 태풍 테마주가 오르고, 누군가 죽으면 관련주가 들썩이는 차가운 현실... 그런 뉴스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오르나?" 하고 검색창을 두드리는 제 손가락을 보며, 저 역시 조일현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번호표를 쥐고 계신가요? 우리는 모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립니다. 더 높은 수익, 더 좋은 아파트, 더 빛나는 명예를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그 줄의 끝에 있는 것이 과연 우리가 꿈꾸던 행복일까요? 영화 <돈>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작성해본 적이 있느냐고 말이죠. 저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참 동안 거실 불을 켜지 못한 채 앉아 있었습니다.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들의 불빛이 마치 주식 창의 숫자들처럼 깜빡거리는 것 같아 어지러웠거든요.
여의도 지하에 숨겨진 차가운 진실, 픽션과 팩트 사이의 서늘함
이 영화는 박누리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의도 증권가의 생리를 날카롭게 포착해냈습니다. 실제로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여의도로 출퇴근하며 수많은 브로커를 인터뷰했다고 하죠. 그래서인지 극 중 동명증권 사무실의 공기나, 장 시작 직전의 팽팽한 긴장감은 실제 현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생생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주식’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실은 누군가의 피땀 어린 돈이자, 누군가에게는 사냥감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준 한국 영화가 또 있을까 싶네요.
흥미로운 점은 영화 속 ‘스프레드 거래’나 ‘프로그램 매매’를 이용한 작전들이 실제 주식 시장에서 발생했던 여러 사건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초에 수만 번의 주문이 오가는 알고리즘의 세계에서, 인간의 윤리는 소수점 아래로 사라지기 십상이죠. 특히 유지태가 연기한 ‘번호표’라는 캐릭터는 실체가 없는 권력을 상징합니다. 돈의 액수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배후의 얼굴은 흐릿해지고, 오로지 숫자의 위력만 남게 되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셈이에요.
또한, 다니엘 헤니가 카메오로 출연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은 한국 주식 시장이 글로벌 자본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돈에는 이름이 없다"는 말처럼, 우리가 투자한 돈이 어디로 흘러가 누군가를 죽이거나 살리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죠. 영화는 이런 차가운 금융의 세계를 류준열이라는 뜨거운 인간의 눈을 통해 투영함으로써, 관객들이 단순히 돈을 쫓는 것을 넘어 ‘돈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제 글을 좀 맺어야겠네요. 베란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습니다. 아파트 단지의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꺼져가는 걸 보며, 저도 오늘 하루 제 마음속의 ‘번호표’를 내려놓으려 합니다. 거창한 부자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 곁의 사람들과 마주 앉아 따뜻한 찌개 한 그릇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그런 소박한 부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도 오늘 하루, 숫자가 아닌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요? 통장 잔고의 늘어남보다 내 마음속 평온함의 잔고가 얼마나 차 있는지 확인해보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아요. 돈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지만, 우리를 대신해 살아줄 수는 없으니까요. 내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한 번쯤 물어보세요. "나는 지금 내 삶의 주인인가, 아니면 숫자의 노예인가?"라고요. 자, 이제 저도 다시 제 삶의 운전대를 잡으러 가보겠습니다. 여러분의 내일은 숫자가 아닌 웃음으로 가득 차길 빌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