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타임, 폭우 속의 결혼식과 내 방의 빗소리가 만나는 순간

영화 어바웃 타임 포스터 이미지

오늘 제 기분은 꼭 눅눅해진 비스킷 같아요. 어제 퇴근길에 비가 갑자기 쏟아지는 바람에 우산도 없이 편의점까지 전력 질주를 했거든요. 겨우 들어간 편의점에서 캔맥주 두 캔이랑 감자칩 하나를 사서 집에 돌아왔는데, 젖은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현관 바닥에 주저앉아 맥주부터 땄습니다. 주말 아침엔 밀린 빨래를 다 돌려놓고 홀가분하게 앉아 있고 싶었는데, 비가 오니 베란다 창문에 맺힌 물방울만 멍하니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이 영화, '어바웃 타임'을 왜 다시 꺼내 보게 됐냐면요. 사실 지난주에 아버지랑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고 아직 화해를 못 했거든요. 전화 한 통이면 될 일인데 그게 참 안 되더라고요. 마음 한구석이 찝찝한 상태로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뒤적이다가, 이 영화 포스터 속 레이첼 맥아담스의 붉은 드레스와 환한 미소를 보니 왠지 위로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줄거리가 잘 기억 안 날 정도로 초반에는 영국 특유의 흐릿한 날씨와 주인공 팀의 어수룩한 모습에 취해 있었습니다. 성인이 된 날 아버지가 건네는 "우리 가문 남자들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황당한 고백이, 어제 제가 맥주를 마시며 했던 "아, 어제로 돌아가서 비 오기 전에 빨래 좀 널 걸" 하는 후회와 묘하게 겹쳐서 피식 웃음이 나더라고요. 아, 이 부분은 제가 다시 봐도 참 부러워요. 어두운 옷장 속에 들어가 주먹을 꽉 쥐기만 하면 쪽팔렸던 어제의 나를 지울 수 있다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는 판타지잖아요.

폭우 속의 결혼식과 내 방의 빗소리가 만나는 순간

영화 속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면서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릿한 장면은 단연 '비 내리는 결혼식'이에요. 평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 날,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막이 날아가는 아수라장이 펼쳐지죠. 그런데 주인공 메리는 엉망이 된 머리와 젖어버린 붉은 드레스를 입고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웃더라고요.

그 장면을 보는데 작년 여름 우리 집 천장이 살짝 샜던 기억이 났습니다. 갑자기 거실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당황해서 양은냄비를 받쳐놓고는 남편이랑 거실 한복판에서 헛웃음을 터뜨렸거든요. "야, 이거 진짜 영화 같다"면서요. 완벽하지 않아도, 아니 오히려 엉망진창이라서 더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팀이 시간을 되돌려 이 날씨를 바꿀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바꾸지 않기로 한 건 그 '엉망진창인 행복'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겠죠.

사실 저는 팀이 동생 킷캣의 사고를 막기 위해 시간을 되돌렸다가 자신의 아이가 바뀌어버린 것을 깨닫고 절망하는 장면에서 큰 충격을 받았어요. 아, 이 부분은 제가 다시 봐도 너무 무섭더라고요.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돕기 위해 한 선택이, 또 다른 소중한 것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삶의 잔혹한 법칙 말이에요. 마치 우리가 어릴 적 아버지가 사 오신 붕어빵 봉투의 온기를 기억하지만, 그 온기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포기해야 했던 수많은 저녁 시간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처럼요.

아버지와의 마지막 산책, 그리고 독자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

영화 후반부, 암에 걸린 아버지와 팀이 함께 과거로 돌아가 해변을 걷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저는 그 장면에서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져서 소파 옆에 둔 휴지 한 통을 다 썼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쳐준 '행복을 위한 마지막 비결'은 시간을 되돌려 대단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평범한 하루를 두 번 살아보는 것이었죠.

처음 살 때는 긴장과 걱정 때문에 놓쳤던 이웃의 미소, 점원과의 농담, 하늘의 색깔을 두 번째 살 때는 온전히 느끼는 그 태도 말이에요. 여러분도 혹시 저처럼 "내일은 좀 다를 거야"라며 오늘을 대충 흘려보내고 계시진 않나요? 아니면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며 과거의 옷장 속에 갇혀 계시지는 않나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거실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가만히 들어봤습니다. 눅눅한 공기가 싫었는데, 가만히 들으니 빗소리가 꽤 리드미컬하더라고요. 어제 비를 쫄딱 맞으며 뛰어왔던 그 길도, 사실은 오랜만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본 생동감 넘치는 순간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의 오늘 중 가장 평범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혹시 그 순간이 훗날 우리가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다시 가고 싶은 '가장 특별한 장면'은 아닐까요?

워킹 타이틀의 감성과 리처드 커티스가 숨겨둔 팩트들

리처드 커티스 감독은 사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러브 액츄얼리'나 '노팅 힐'의 각본을 쓴 로맨틱 코미디의 거장이에요. 그런데 이 영화 '어바웃 타임'은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유독 결이 다릅니다. 남녀 간의 사랑보다 '부자간의 사랑'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고 있거든요.

흥미로운 사실은 원래 여주인공 메리 역에 '500일의 썸머'로 유명한 조이 데이셔넬이 낙점됐었다는 거예요. 하지만 스케줄 문제로 하차하면서 레이첼 맥아담스가 그 자리를 꿰찼죠. 결과적으로는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 붉은 드레스의 찬란함을 누가 소화했을까 싶거든요. 또한, 영화 속 주인공 가족이 사는 콘월의 저택은 실제 사람이 거주하는 집을 빌려 촬영했는데, 그 아름다운 정원과 해변은 지금도 전 세계 팬들의 성지가 되어 있습니다.

음악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죠. 지하철역에서 거리 공연자들이 연주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How Long Will I Love You'는 사실 엘리 굴딩의 곡으로 유명하지만, 영화 속 그 투박한 버스킹 버전이 주는 감동은 비길 데가 없습니다. 리처드 커티스는 이 영화를 통해 "시간 여행은 결국 필요 없다"는 역설을 완성합니다. 제작비 1,200만 달러로 전 세계에서 8,700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린 건, 단순히 판타지가 재밌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진 '오늘'이라는 보석을 일깨워줬기 때문일 거예요.

이제 맥주 캔도 비었고, 빗소리도 조금 잦아들었네요. 건조기 대신 건조대에 하나하나 빨래를 널면서, 내일은 꼭 아버지께 먼저 전화를 드려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아빠, 비 오는데 막걸리에 파전이나 먹으러 갈까?" 하고 말이죠.

결론적으로... 아차, 이런 딱딱한 말은 안 쓰기로 했죠. 그냥 오늘 밤은 불을 끄고 누워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복기해보려 합니다. 출근길에 마주친 길고양이의 눈빛, 점심시간에 마신 커피의 쌉싸름한 향기 같은 것들을요.

혹시 여러분도 지금 이 순간, 너무 바빠서 놓치고 있는 소중한 것들이 있다면 잠시 멈춰 서서 심호흡 한 번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미 가장 완벽한 시간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