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평가된 존재들의 반란 내 삶의 '출루율'은 얼마일까요, 영화 머니볼

영화 머니볼 포스터 이미지

확률이라는 차가운 숫자 속에서 발견한, 가장 뜨거운 인간의 얼굴

주말 아침이면 습관적으로 세탁기를 돌립니다. 탈수되는 과정에서 나는 그 덜덜거리는 진동 소리를 듣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더라고요. 오늘은 밀린 빨래를 다 널어놓고 거실 소파에 앉았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유독 낮게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비가 오려는지 바람이 제법 선선하더라고요. 이런 날은 화려한 액션물보다는 묵직하게 가슴을 눌러주는 영화가 당기곤 하죠. 그래서 제가 선택한 영화가 바로 브래드 피트 주연의 <머니볼>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왜 다시 보게 됐냐면요, 사실 제가 요즘 무언가에 자꾸 '패배'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던 것 같아요. 지난주에 야심 차게 준비했던 기획안이 회사에서 단칼에 거절당했거든요. "통계적으로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차가운 피드백을 들으면서 말이죠. 어릴 적 아버지가 퇴근길에 사 오셨던 붕어빵 봉투의 그 따뜻한 온기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데이터가 아니라 진심이라고 믿어왔던 저에게는 꽤 큰 상처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바로 그 '데이터'와 '숫자'를 가지고 세상의 편견과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잖아요. "야구는 통계다"라고 외치는 차가운 영화일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이건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외로운 한 남자의 투쟁기더라고요. 캔맥주 한 잔을 따서 홀짝이며, 빌리 빈 단장의 굽힐 줄 모르는 고집 속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저평가된 존재들의 반란, 내 삶의 '출루율'은 얼마일까요

영화 속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정말 답이 없는 팀이었습니다. 돈은 없고, 잘하는 선수들은 연봉 많이 주는 큰 구단으로 다 떠나버렸죠. 빌리 빈(브래드 피트)은 여기서 혁신적인 선택을 합니다. 남들이 외모나 타격 자세, 사생활 같은 '느낌'으로 선수를 뽑을 때, 오직 '출루율'이라는 숫자 하나에만 집중한 예일대 출신의 피터 브랜드(조나 힐)를 영입하죠. 저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 사실 저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소위 말하는 '스펙'이나 '겉모습' 때문에 제대로 된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순간들이 많았거든요.

영화에서 나이 많고 부상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버려졌던 선수들이 오직 '공을 골라내는 능력' 하나로 승리를 만들어내는 장면을 보는데, 괜히 제 코끝이 찡해지더라고요. 작년 여름 우리 집 천장이 샜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수리를 하러 오신 기사님이 연세가 꽤 있으셨거든요. 처음엔 "과연 잘 고치실 수 있을까?"라고 의심했던 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분이 수십 년간 쌓아온 손기술은 그 어떤 최신 장비보다 정확했거든요. 빌리 빈이 영입한 선수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세상의 기준에서는 '하자' 있는 물건 취급을 받았지만, 그들 각자가 가진 고유의 가치는 숫자가 증명해주고 있었죠.

사실 빌리 빈이 노련한 스카우트들과 회의실에서 말다툼을 벌이는 장면은 제가 다시 봐도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감이 넘칩니다. "당신들은 야구를 몰라!"라고 소리치는 구닥다리 전문가들에게 빌리가 던진 질문, "우리가 진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말은 제 가슴에 깊이 박혔습니다. 우리는 가끔 문제의 본질은 잊은 채, 남들이 정해놓은 방식대로만 살려고 애쓰잖아요. 저 또한 그랬던 것 같아요.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할 때마다, 제가 가진 '출루율'이 무엇인지 고민하기보다 남들의 '홈런'만 부러워하며 살았던 거죠.

20연승의 기적 뒤에 찾아온 공허함, 그리고 딸의 노래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20연승 달성 장면은 정말이지 짜릿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승리의 환호보다, 텅 빈 경기장에 홀로 앉아 있는 빌리의 뒷모습이 더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여러분도 혹시 저처럼, 목표했던 무언가를 이룬 뒤에 오히려 더 큰 허무함을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빌리는 팀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이끌었지만, 정작 본인은 야구 경기를 직접 보지 못합니다. 너무 긴장해서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믿는 그 시스템이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보였거든요.

영화가 끝나갈 무렵, 빌리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파격적인 연봉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오클랜드로 돌아옵니다. 그때 차 안에서 딸 케이시가 불러주는 "The Show"라는 노래가 흘러나오죠. "I'm just a little girl lost in the moment(난 그저 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작은 소녀일 뿐이에요)"라는 가사를 들으며 빌리는 엷은 미소를 짓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제가 다시 봐도 잘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더라고요. 세계를 바꾼 혁신가가 왜 고작 딸의 노래 한 소절에 모든 성공의 기회를 내려놓았을까? 아마도 그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통계가 세상을 바꿀 수는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건 결국 이런 사소하고 따뜻한 '순간'들이라는 것을요.

독자 여러분도 혹시 지금 너무 치열하게 숫자로 자신을 증명하며 살고 있지는 않나요? 성과지표, 통장 잔고, SNS의 좋아요 개수 같은 것들 말이에요. 가끔은 빌리 빈처럼 그 숫자들을 잠시 내려놓고, 누군가 나를 위해 불러주는 서툰 노래 한 소절에 귀를 기울여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야구는 실패가 더 많은 게임이라잖아요. 3할 타자도 열 번 중 일곱 번은 아웃되는 게 야구니까요. 우리 인생도 오늘 좀 실패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더라고요. 내일 또 타석에 설 기회는 반드시 오니까요.

세이버매트릭스, 야구라는 낭만에 찬물을 끼얹은 혁명의 실체

이 영화 <머니볼>은 마이클 루이스의 동명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2002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빌리 빈 단장은 야구계의 이단아로 불리며 이 엄청난 실험을 강행했죠. 그가 도입한 '세이버매트릭스(Sabermetrics)'는 야구 통계 분석학을 일컫는데, 통계의 아버지라 불리는 빌 제임스의 이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영화에서도 잠깐 언급되지만, 당시 야구인들은 이 이론을 "책상머리에 앉아 숫자나 만지는 사람들의 헛소리"라며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팩트는 냉혹했습니다. 빌리 빈의 오클랜드는 뉴욕 양키스의 3분의 1도 안 되는 자본으로 메이저리그 최다 연승인 20연승을 일궈냈고, 이는 야구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다소 고집스러운 인물로 그려진 아트 하우 감독과의 갈등이나, 실제로는 팀의 핵심 전력이었던 3인방 투수들의 활약이 생략된 부분도 있지만, 이는 '혁신가' 빌리 빈의 고뇌를 더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영화적 장치였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보스턴 레드삭스는 이 '머니볼' 철학을 받아들여 2004년, 무려 86년 만에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결국 빌리는 우승 반지를 끼지 못했지만, 야구라는 게임의 법칙을 영원히 바꿔버린 승리자가 된 셈이죠.

캔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 나니 어느새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네요.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보고 있으니, 영화 속에서 빌리가 듣던 라디오 중계 소리가 귓가에 쟁쟁한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도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데이터 덩어리일지도 모르지만, 그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가치를 부여할지는 결국 우리의 몫이겠죠.

내일은 월요일, 다시 전쟁 같은 일상이 시작되겠지만 저는 조금 다른 기분으로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기획안이 거절당한 그 '데이터' 뒤에 숨겨진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빌리 빈이 출루율 높은 선수들을 찾아냈던 것처럼, 저도 저만이 가진 독특한 강점을 숫자로 증명해 보려고요. 아,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다퉜던 친구에게 먼저 문자를 보내야겠습니다. "미안하다, 내 출루율 계산이 좀 틀렸던 것 같아"라고요. 아마 그 친구는 "뭔 소리야?"라며 웃겠죠. 자, 이제 빨래를 다 갰으니 오늘 하루도 이렇게 마무리해봅니다. 다들 자기만의 리그에서 씩씩하게 살아남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