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보일러와 월스트리트의 '인사이드 잡', 텅 빈 지갑과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들, 찰스 퍼거슨의 집념과 아카데미가 인정한 진실

 

영화 인사이드잡 포스터 이미지

어제는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 녀석을 만났거든요. 한때는 꿈이 뭐냐며 밤새 떠들던 친구였는데, 어제는 내내 비트코인 수익률이랑 영끌해서 산 아파트 대출 이자 얘기만 하더라고요.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는데, 왠지 모르게 저도 그 숫자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표정이라 마음이 참 씁쓸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밤 11시가 훌쩍 넘었더라고요. 괜히 잠도 안 오고 해서 주방 구석에 박혀있던 유자차를 한 잔 탔습니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컵을 쥐고 소파에 앉았는데, 문득 예전에 봤던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잡'이 떠올랐어요. 이 영화를 왜 다시 꺼내 보게 됐냐면요, 사실 아까 친구와 나눴던 대화 속의 그 '불안함'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진짜 뿌리를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우리가 왜 이렇게 숫자에 목을 매며 살게 됐는지, 누가 이 판을 이렇게 짜놓았는지 말이에요. 2011년쯤인가 처음 봤을 때는 너무 어려워서 중간에 졸기도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더라고요.

사실 다큐멘터리라 줄거리가 잘 기억 안 날 정도로 정보량이 엄청나긴 했습니다. 맷 데이먼의 그 신뢰감 있는 목소리가 배경으로 깔리는데, 그게 오히려 더 무섭게 들리더라고요. 아, 이 부분은 제가 다시 봐도 잘 이해가 안 가요. 어떻게 저렇게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만든 상품이 세상을 망칠 거라는 걸 모르고(혹은 모른 척하고) 저질렀을까요? 차를 마시며 화면을 보는데, 밖에서 갑자기 쌩하고 지나가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 소리가 마치 2008년에 터진 거대한 경고음처럼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고장 난 보일러와 월스트리트의 '인사이드 잡'

영화의 도입부에서 아이슬란드의 평화로운 풍경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는데, 문득 작년 겨울에 우리 집 보일러가 고장 났던 기억이 나더라고요. 분명히 며칠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는데, 갑자기 어느 날 아침에 얼음물처럼 차가운 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수리 기사님을 불렀더니 내부 부품 하나가 이미 오래전부터 삭아 있었다고 하셨어요.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안에서는 이미 끝이 나 있었던 거죠. '인사이드 잡'이 보여주는 2008년 금융위기도 딱 그랬던 것 같아요. 전 세계 경제라는 거대한 보일러가 겉으로는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 안은 탐욕이라는 녹물로 가득 차 있었거든요.

[인사이드 잡은 단순한 경제 위기 보고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시스템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거대한 '내부자 거래'에 대한 고발장입니다.] 영화 속에서 찰스 퍼거슨 감독이 거물급 경제학자나 관료들을 인터뷰하며 "당신이 받은 그 돈과 이 보고서 사이에 연관이 없느냐"고 집요하게 물을 때, 그들의 당황한 눈빛과 헛기침 소리가 어찌나 생생한지 몰라요.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지난달에 가전제품을 사러 갔을 때, 본인 실적 때문에 저한테 필요도 없는 비싼 옵션을 억지로 끼워 팔려던 판매원의 눈빛이 떠올랐습니다. 규모만 다를 뿐, 본질은 똑같더라고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손해를 당연시하는 그 태도 말이에요.

어릴 적 아버지가 퇴근길에 사 오신 붕어빵 봉투의 온기를 기억하시나요? 아버지는 그 붕어빵이 식을까 봐 외투 품 안에 꼭 품고 오셨죠. 그건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고 사랑이었잖아요. 그런데 이 영화에 나오는 월스트리트의 주인공들은 그 반대예요. 자기들이 먹을 붕어빵은 미리 빼돌려 놓고, 다 식어서 딱딱해진 빈 봉투만 남들에게 비싼 값에 팔아치웁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니 CDO니 하는 어려운 용어들로 포장했지만, 결국은 남의 주머니를 털어 제 배를 채운 '소매치기'나 다름없더라고요.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시는데 속이 다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우리가 믿고 맡긴 돈들이 저런 식으로 공중분해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거든요.

텅 빈 지갑과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들

영화가 끝난 뒤의 여운은 생각보다 훨씬 씁쓸하고 묵직했습니다. 마지막에 "싸울 가치가 있는 일들이 있다"는 메시지가 나올 때, 저는 텅 빈 제 유자차 컵을 한참 동안 내려다봤어요. 여러분도 혹시 저처럼, 세상이 너무 거대하고 복잡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 적 있으신가요? 열심히 일해서 저축하고, 성실하게 세금을 내며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왜 항상 저들의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영화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지만 적어도 '누구의 잘못인지'는 똑똑히 가르쳐주더라고요.

사실 영화 중반부에 나오는 대학 교수들의 인터뷰가 제일 충격적이었어요. 지성의 상징이라는 학자들이 돈을 받고 유리한 논문을 써줬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제가 믿고 있던 세상의 질서가 한 번 더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친구와 다투고 아직 화해하지 못한 찝찝한 마음이 있었는데, 영화 속 저들의 뻔뻔한 태도를 보니 제 고민은 차라리 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였어요. 적어도 저는 미안함이라도 느끼고 있으니까요. 여러분, 우리는 과연 저들보다 나은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저들이 짜놓은 탐욕의 판 위에서 똑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요?

영화가 다 끝나고 창밖을 보니 어느새 새벽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더라고요. 맷 데이먼의 차분한 내레이션이 멈춘 자리에 남은 건, 여전히 책임지지 않는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차가운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사이드 잡'은 우리에게 눈을 뜨라고 말합니다. 모르면 당하고, 관심 없으면 빼앗긴다는 걸요. 가계부를 정리하다가 한숨을 내뱉는 우리의 일상이 사실은 저 거대한 월스트리트의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는 밤이었습니다.

찰스 퍼거슨의 집념과 아카데미가 인정한 진실

이 다큐멘터리가 단순한 기록물을 넘어 예술적인 완성도를 인정받는 이유는 감독 찰스 퍼거슨의 무시무시한 집념 덕분입니다. 그는 실제로 기술 기업을 창업해 큰돈을 벌었던 소프트웨어 전문가 출신이에요. 그래서인지 복잡한 금융 데이터를 분석하는 능력이 탁월했고, 무엇보다 저들에게 굽실거릴 필요가 없는 경제적 자유가 있었죠. 그래서 영화 속 인터뷰가 그토록 날카롭고 거침없을 수 있었던 겁니다.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을 때, 그는 무대 위에서 "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3년이 지났지만, 처벌받은 금융인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일갈했습니다. 그 장면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순간이었죠.

실제로 이 영화가 제작될 당시, 수많은 경제학자와 금융권 인사들이 인터뷰를 거절하거나 법적 대응을 검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방대한 자료 조사와 팩트 체크를 통해 그들의 입을 막아버렸죠. 특히 아이슬란드의 붕괴 사례를 전 세계 위기의 축소판으로 제시한 구성은 지금 봐도 소름 돋는 통찰력입니다. 영화 중간중간 나오는 화려한 맨해튼의 스카이라인과 그 이면에 숨겨진 마약, 성매매 등 월가 황금기(?)의 어두운 사생활에 대한 폭로는 자본의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200만 달러라는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의 심장을 찌른 이 작품은, 진실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증명하는 팩트 폭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유자차 잔도 다 식었고, 방 안의 정적만 남았네요. 내일 아침엔 일찍 일어나서 친구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내야겠습니다. "어제는 미안했다, 우리 숫자 얘기 말고 진짜 우리 얘기 좀 더 하자"라고요.

결론적으로... 아니, 이런 말투는 역시 저랑 안 맞네요. 그냥 오늘 밤엔 불을 끄고 누워서, 저 화려한 빌딩 숲의 불빛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온기에 더 집중해보려 합니다. 저들이 망쳐놓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우리만의 진실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니까요.

혹시 여러분도 지금 남들이 다 가는 길에 휩쓸려 내 마음의 소리를 못 듣고 계신 건 아닌가요? 오늘 밤엔 '인사이드 잡'을 보며, 내 삶의 '내부자'는 오직 나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새겨보시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