냅킨에 이름을 적어보라는 그 오만한 명령과 구질구질한 출근길,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오늘따라 괜히 마음이 헛헛하더라고요. 주말 내내 밀린 빨래를 두 번이나 돌리고,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를 멍하니 듣고 앉아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정말 '화끈하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 하는 그런 철없는 생각 말이죠. 통장 잔고를 확인하면 한숨부터 나오면서도, 유튜브에 떠도는 슈퍼카 영상이나 호화로운 호텔 브이로그를 보면 나도 모르게 '좋아요'를 누르고 있는 제 모습이 참 우습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꺼내 들었습니다. 이 영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를요. 사실 예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냥 디카프리오가 참 잘생겼고 인생 막 사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더라고요. 비가 오려는지 창밖 하늘은 꾸물꾸물하고, 편의점에서 사 온 팝콘 봉지를 뜯으며 다시 이 영화를 튼 이유는 아마 제 안의 억눌린 욕망을 대리 만족이라도 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아요.
사실 줄거리가 잘 기억 안 날 정도로 영상미와 에너지에 취해 있었습니다.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중간에 팝콘을 먹다가 너무 웃겨서 사레가 들리는 바람에 물을 마시러 주방에 다녀온 시간을 빼면,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영화를 왜 다시 보게 됐냐고 물으신다면, 단순히 자본주의의 끝판왕을 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 화려함 속에 숨겨진 '인간의 바닥'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요즘처럼 성실하게 사는 것보다 '한 방'을 노리는 게 미덕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조던 벨포트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그 광기 어린 질주가 저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지 궁금했거든요.
냅킨에 이름을 적어보라는 그 오만한 명령과 나의 구질구질한 출근길
영화 속에서 조던 벨포트가 친구에게 볼펜을 건네며 "내게 이 펜을 팔아봐"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 장면을 보는데 갑자기 작년 이맘때쯤 제 모습이 겹치더라고요. 회사 면접을 보러 갔을 때, 면접관이 제 이력서를 훑어보며 "본인이 우리 회사에 왜 필요한지 1분 안에 증명해 보세요"라고 했던 그 차가운 목소리 말이죠. 그때 저는 조던 벨포트처럼 당당하게 수요와 공급을 논하기는커녕, 손바닥에 땀을 쥐며 간절함만 어필했었거든요. 영화 속 그들은 개잡주를 팔면서도 마치 세상을 구하는 영웅처럼 포효하는데, 저는 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조차 그렇게 버거워했으니 참 대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조던이 월스트리트의 화려한 사무실에서 직원들을 향해 미친 듯이 연설하는 장면을 보면서, 제가 매일 아침 몸을 구겨 넣는 9호선 지하철 안의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다들 무표정한 얼굴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지만, 실은 그 안에서 다들 '조던 벨포트' 같은 삶을 꿈꾸고 있는 건 아닐까 싶더라고요. 이번 달 카드 값을 걱정하고,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나도 저렇게 돈을 물 쓰듯 써보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고 있는 거죠. 저 역시 그랬거든요. 영화에서 랍스터를 던지고 헬기에서 마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저건 범죄야"라고 손가락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압도적인 자본의 힘에 묘한 동경을 느끼는 제 자신이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아, 이 부분은 제가 다시 봐도 참 이해가 안 가는 감정인 것 같아요. 증오하면서도 닮고 싶은 그 양가적인 마음 말이에요.
화려한 파티가 끝난 뒤, 우리가 마주해야 할 텅 빈 거울
영화가 끝으로 갈수록 조던 벨포트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집니다. 돈은 산처럼 쌓여가지만, 그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죠. 나오미와의 결혼 생활이 파탄 나고, 약 기운에 취해 어린 딸을 차에 태우고 도주하다 사고를 내는 장면에서는 정말 진절머리가 나더라고요. 그토록 갈망하던 부와 권력이 결국 인간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니까요. 여러분도 혹시 저처럼, 간절히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 오히려 더 큰 공허함을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예전에 사고 싶던 비싼 가방을 할부로 긁고 나서, 막상 배송받은 날 밤에 느꼈던 그 허무함이 생각나더라고요. "이게 뭐라고 내가 그렇게 목을 맸나" 하는 그런 기분 말이죠.
영화의 마지막, 감옥에서 나와 강연자로 나선 조던이 수강생들에게 다시 펜을 건네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빛에는 여전히 그에 대한 경멸보다는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돈을 벌 수 있나요?"라는 갈망이 가득 차 있었거든요. 그 장면을 보며 저는 문득 거울을 봤습니다. 영화관 문을 열고 나가는 사람처럼, 혹은 이 긴 이야기를 마치고 일어나는 저처럼요. 우리는 모두 조던 벨포트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 모두 잠재적인 늑대일 뿐일까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소파에서 일어날 수 없었던 건, 그 수강생들의 눈빛이 바로 제 눈빛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90년대 월가를 뒤흔든 진짜 '늑대'의 흔적, 그리고 씁쓸한 팩트 체크
이 영화가 이토록 생생한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었던 건, 조던 벨포트라는 실존 인물의 자서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90년대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스트래튼 오크먼트'라는 회사가 운영되었고, 영화에서 묘사된 기행들—사무실 내의 스트립쇼나 동물 학대 수준의 파티들—이 상당 부분 사실이었다는 점이 소름 돋죠.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 영화의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실제 조던 벨포트를 영화 마지막 장면에 카메오로 출연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강연자로 나선 디카프리오를 소개하는 그 실제 인물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현실이 영화보다 더 지독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더 놀라운 건, 조던 벨포트가 실제 복역 후 나와서 여전히 동기부여 강연가로 활동하며 큰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피해자들에게 갚아야 할 배상금이 어마어마한데도, 그는 자신의 '실패한 성공담'을 팔아 다시 부를 축적하고 있죠. 자본주의가 가진 가장 잔인하고도 매혹적인 이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는 그를 심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를 소비하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 전체를 비판하고 있는 셈이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이 배역을 위해 실제 만취한 취객의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며 연구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며 보여준 그 '뇌성마비 수준의 약 기운 연기'는 단순히 연기가 아니라, 탐욕에 마비된 인간의 영혼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 같더라고요.
이제 슬슬 팝콘 부스러기를 정리해야겠네요. 영화를 보고 나니 맥주라도 한 캔 더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이지만, 내일 또 출근해야 하는 소시민의 일상으로 돌아가야겠죠. 조던 벨포트처럼 랍스터를 던지지는 못해도, 적어도 내일 아침 거울 앞에서는 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눈빛을 보내고 싶네요. 여러분은 오늘 어떤 펜을 팔고 계신가요? 혹은 누군가 건네는 펜에 영혼을 팔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빗소리가 조금 잦아든 것 같네요. 다들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따뜻하고 평온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제 빨래를 널러 가야겠어요. 인생은 한 방이 아니라, 어쩌면 매일 널어야 하는 빨래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요.